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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327. 더 레슬러(2008)- 스타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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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더 레슬러(2008)- 스타는 무엇으로 사는가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2.16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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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수그러들고 있다. 과거에는 화려했던 이 남자. 마초 끼가 넘쳐났었는데. (그러나 여성에 대한 우월감은 아니다.)

자기 안에서 꺼지기 직전의 불꽃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별명 램 잼으로 불리는 그는 프로 레슬러 선수다.

한때 전 미국을 호령할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1989년 전성기 때 프로레스링 챔피언이었다. 소개가 필요 없는 사람. 중동의 야수와 맞대결을 펼친다. 맞을수록 괴력을 발휘하는 그는 미국의 영웅.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그 세월은 짧지 않고 길다.

그가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밀린 월세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리인에게 그는 챔피언이 아니라 월세도 못 내는 ‘밥맛’일 뿐이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다.

아무리 인기가 시들해도 그렇지. 경기장에는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팬이 있다. 허나 그의 쓸쓸한 표정은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는 가을 낙엽처럼 외롭다.

쓸쓸한 뒷모습은 숨길수 없는 늙은이의 자세 그대로다. 내가 누구인가. 램 잼 아닌가. 그 이름 하나 만으로도 세상은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삼류 게임이나 하고 슈퍼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버틴다. 자존심 같은게 있다면 개나 주라면서 자동차 안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한다.

데런 아르노 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를 보면서 나는 박치기로 유명했던 김일을 생각했다. 박치기왕 김일은 나의 청춘을(그러니까 중, 고등학교 시절) 온통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세상이 온통 시니컬 했어도 원폭 박치기 한 방에 1미터 90의 거구 안토니오 이노키가 나가떨어질 때면 대한독립 만세가 절로 터져 나왔다. (김일과 이노키는 모두 역도산의 제자였다. 일본인 이노키는 권투 선수 알리와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국민을 다룰 줄 알았던 당시 절대자 박통은 박치기를 사랑했다. 그래서 프로 레슬링 경기는 중계됐고 경기장은 늘 인산인해였다.

내 인생은 프로 레슬링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결코. ( 여담이지만 그가 부하에게 살해된 후 등장한 신군부는 프로 레슬링 대신 프로야구나 프로 축구에 투자했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3에스로 불렸던 스크린 스포츠 섹스로 국민적 관심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

김일을 아는 내가 프로 레슬링의 왕자였다가 지금은 몰락해 동네 아이들과 노는 램 잼의 심사를 모를 리 없다.

그는 여전히 동료나 후배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나 존경이 밥 먹여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경기장으로 관객을 끌어 드리기 위해 면도칼로 이마를 찢고 거친 경기를 마다 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푼 돈을 걸고 피나는 경기를 벌이고 그가 빈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슬픈 몰골의 사나이였다. ( 전투에서 진 적이 없는 돈키호테가 온종일 싸우고 돌아와 녹초가 된 모습을 연상하시라.)

▲ 쓰러진 상대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포즈을 취하고 있다. 한 때 안방극장을 장악했던 프로 레슬링의 향수가 자연히 떠오른다. 관중이 떠난 스타는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은 비록 레슬링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 쓰러진 상대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포즈을 취하고 있다. 한 때 안방극장을 장악했던 프로 레슬링의 향수가 자연히 떠오른다. 관중이 떠난 스타는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은 비록 레슬링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그가 유일하게 즐거울 때는 스트립 바의 캐시디( 마리사 토메이)를 만날 때다. 여러 남자들 사이를 오가는 그녀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다. 약을 하고 농담을 따먹으면서 번 돈을 그렇게 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심장마비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다. 의사는 경기를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그도 그 경고를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헤어졌던 딸을 찾아 간다. ( 그 딸은 또래 여자와 함께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사이 인 듯 하다.) 그리고 잘못을 빈다. 딸은 당신은 쓰레기라며 거부하나 아빠를 받아 들인다.

캐시디가 고른 옷을 선물 받고 딸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긴다. 식사 자리도 마련했다. 그러나 램 잼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클럽에서 만난 여성과 놀아다가 다음날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딸과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 불능이다. 실패한 인생. 그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가 거울을 본다. 한 때 최고의 선수였다가 지금은 잊혀지는 존재 프로 레슬링 스타 램 잼. 내 인생에서 은퇴는 없다. 못한다는 말은 사라졌다.

그가 다시 사각의 링에 올라선다. 상대방은 악당이고 그는 언제나 영웅이다. 그가 설 곳은 링이지 정육점의 판매원이 아니다.

관절을 뚝 소리가 나게 꺾는다. 목을 졸라 경동맥으로 가는 산소를 막아 상대를 기절시킨다. 로프를 타고 탑까지 오른 후 두 팔을 하늘 높이 벌린다.

길게 늘어 뜨린 노랑머리가 출렁인다. 이때다. 쓰러진 상대를 향해 몸을 날린다. 수평 낙하. 관중의 환호성. 마무리 하라는 관중의 신호를 그는 지켰다.

그는 듣고 있을까. 램 잼을 연호하는 소리를. 더 커지고 더 강해진 그를. 그러나 경기 후 그는 어땠을까. 그것까지 관중들은 생각할 필요없다. 영화가 끝났기 때문이다.

국가: 미국

출연: 미키 루크, 마리사 토메이

평점:

: 식을 줄 몰랐던 프로 레슬링이 식은 것은 프로레슬링은 다 쇼다라는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해외파 김일과 대척점에 있던 국내파 장영철은 프로 레슬링이 사전에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인다고 폭로했다.

그때까지 그런 사실에 대해 추후의 의심도 없었던 미디어와 관객들은 한순간에 등을 돌렸다. 1970년대 중반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프로레슬링은 한국에서 그렇게 사라졌다.

1980년 들어서 신군부는 프로레슬링과 거리를 두었다. (이 대목은 앞서 말했다.) 미국은 우리보다 인기가 조금 더 오래 지속됐으나 그들 역시 과거의 인기를 만회하지 못했다.

인기가 사라지고 나서 한 참후에 영화가 나왔다. 이른바 향수 세대를 위한 호출이라고나 할까. 요란한 복장과 엄청난 근육과 우람한 체격에서 나오는 기세를 관중들에게 한 번 더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욕지기는 물론 상대가 곤죽이 될 때까지 몰아치는 연타는 비록 그것이 쇼라고 할지라도 보고 즐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관중을 위한 배우는 고독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들마저 떠나 버렸을 때 화려했언 옛 영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부러 피를 내고 일부러 호지키스를 몸에 박고 쓰레기 통을 쏫아 붓고 철조망과 유리조각이 온몸에 박히는 쇼만으로는 관객을 끌어 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격투기 등 다른 무엇이 차지했다. 한 때 열광했던 프로레슬링은 유행따라 다시 돌아올 것인가.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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