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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까지 온전히 내 시간속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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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까지 온전히 내 시간속에 존재했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2.12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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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에 의지했던 말년의 할머니 삶이 불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그때 나는 어렸고 행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거나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불행과는 거리가 멀었어도 행복과도 가까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당시 삼시세끼 할머니 식사를 챙겨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불행하지 않았다는 판단의 근거는 오직 굶주림을 면했다는 것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흐릿한 영상 속에 웃는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 모습은 없으므로 할머니가 어떤 식으로 생을 정리했는지 가늠해 볼 수 없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 나는 큰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할머니의 부재로 인해 내가 입을 타격은 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할머니가 있었는지조차 잊었다.

제대로 일상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에 인간이 갖추어야 할 존엄의 순간을 간혹 외면받기도 했던 할머니는 내 일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앞이었기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웃음소리를 듣고도 웃지 못했고 우는 소리에도 쉽게 반응하지 못했다. 파란 하늘을 보면서 나는 모든 것을 보지 못했던 말년의 할머니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리고 죽음처럼 곧 잊었다. 살갑던 기억도 나지 않는데 굳이 지팡이를 집고 어렵게 일보 전진했던 그 기억을 오래도록 떠올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보고 있는 눈이 하도 고마워서 두 손으로 눈을 감 싸안았다.

손안에서 나는 감지 않고 눈을 뜨고 있었다. 열 손가락 안에서 보는 세상은 좁았으나 편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났다.

나는 더는 늦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벌떡 일어나 손에 닿는 으름을 하나 더 따먹고 아직 덜 익은 으름은 닥치는 대로 훑어 내려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언제 다시 이 낭떠러지 언덕에 오를 수 있을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산정으로 달렸다. 곧 호흡이 벅찼고 땀이 흘렀다. 사방은 어두워지는데 형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갈 수는 있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산의 위치와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산에서 실종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아도 쉬지 않고 위로 계속해서 오른 것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작은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였다.

예상했던 대로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누구도 나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되레 슬펐으나 들키지 않고 어두운 저녁까지 온전히 내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으로 나는 쉽게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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