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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잉여인간>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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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잉여인간> (1958)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1.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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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서만기 치과의원 원장 서만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주인공은 당연히 만기가 되겠다. 그러나 만기보다는 일단 세 명의 여성을 주목해 보자.

먼저 만기의 중학교 친구 천봉우의 처다. ( 처는 결혼한 관계로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냥 봉우 처로 나온다. 만기의 부인도 마찬가지. 미혼인 간호사 홍인숙과 만기의 처제가 은주로 이름이 나오는 것과는 다르다. )

봉우 처는 지금으로 치면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대단한 활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전후 서울의 음침한 풍경을 확 바꾸고도 남을 새싹과도 같은 존재다.

우선 그녀의 돈이 어느 정도인지 보자. 만기가 세 들어 사는 건물의 소유주다. 그리고 치과에 필요한 기계도 전부 그녀의 소유다. 하고 싶은 말, 하고자 하는 행동은 무엇이든 하는 강력한 실천력은 그녀의 이런 재력에서 나왔다.

상상이 되는가. 그녀가 잘 차려입고 색깔 있는 우산을 쓰고 한 손에는 미제 핸드백을 들고 활보하는 모습이. 마치 여왕의 행차처럼 화려하면서도 우아할 것이다. 봉우 처라고는 하지만( 봉우라는 이름은 왠지 시골스럽지 않은가. 남편과 처는 재력은 물론 성격에서도 정반대라고 봐야 한다.) 처가 아닌 처녀라고 해도 될 만큼 생기가 아주 발랄하다 못해 넘치고도 남는다.

그런 그녀가 점 하나를 찍었다. 그녀가 찍은 방점은 다름 아닌 남편의 친구 서만기.

만기로 치면 남자의 전형이다. ( 이런 두루뭉술한 표현보다는 손창섭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만기는 문벌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정성 어린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자연스러운 예의범절과 미술 음악 문학은 물론 무용 스포츠 영화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와 고급 감상 안을 가졌다. 한마디로 크로졸 냄새만을 인생의 유일한 권위로 믿고 있는 그런 부류의 의사와는 달랐다. 생김새는 또 어떤가. 서양사람처럼 후리후리한 키와 알맞은 몸집에 귀공자다운 해사한 면모, 말을 할 때는 좋은 말만 골라 했다. 영국풍의 신사다.)

그녀가 찍을 만하지 않은가. 그냥 찍은 게 아니고 금도끼로 찍었다. 재력을 무기로 삼았다. 대시하는 기세가 매우 가파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잠깐 만기의 생활고를 살펴보자. 본가는 물론 처가까지 총 14명을 먹여 살리고 있다. 간호원 ( 당시는 간호사가 아닌 간호원으로 호칭됐다. ) 홍인숙의 월급도 석 달이나 밀려 있다. 만기가 돈에 쪼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아는 그녀, 봉우 처가 만기의 부실한 경제력을 파고든다. 여기서 만기는 임도 보고 뽕도 따면 된다. 하지만 작가는 만기를 그런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 만기는 모범생 중에서도 최상급이다. 그러니 봉우 처는 도끼를 잘 못 휘둘렀다. 그녀의 욕망은 끝내 좌절되고 말 것인가.

봉우처가 꾀를 내고 있다. 건물을 팔고 만기를 궁지로 몰 속셈이다. 매매 계약은 성립됐다. 그 전에 봉우 처는 무시로 치과를 드나들면서 그의 가운 자락을 잡아당기거나 배시시 웃는 웃음으로 그를 노골적으로 유혹했다. 봉우가 치과 소파에 앉아 졸 건 말 건 상관없이.

어떤 날은 갈비찜 집으로 끌어들였다. 최신식 치과 기계 도입에 대해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다면서. 그녀는 음식점에서 남편처럼 만기의 옷을 받아 걸거나 식탁 아래로 다리를 뻗어 그의 무릎을 간지럽히고 쓰러질 듯 엎어지기도 한다. 과연 만기는 봉우 처의 유혹을 떨쳐 낼 수 있을까.

▲ 신사 중의 신사, 그야말로 퍼펙트한 남자 서만기와 그의 친구 익준과 봉우, 그리고 봉우처와 처제 은주, 간호사 홍인숙이 등장하면서 고달픈 인생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국전쟁 이후 궁핍과 혼란이 지배하던 시대, 인간군상들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 신사 중의 신사, 그야말로 퍼펙트한 남자 서만기와 그의 친구 익준과 봉우, 그리고 봉우처와 처제 은주, 간호사 홍인숙이 등장하면서 고달픈 인생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국전쟁 이후 궁핍과 혼란이 지배하던 시대, 인간군상들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다음은 만기의 처제 은주다. ( 만기 부인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빠져 있다. 현모양처가 다 그렇지 않은가. ) 은주 역시 만기를 찍었다. 만기라면( 아니 형부) 지금 당장이라도 시집갈 태세다. 모든 것 때려치우고 푸른 밤 제주도로 달려가듯이 만기의 품에 덥석 안길 것이다.

대놓고 키스해도 되느냐고 언니 앞에서 수작질을 벌이는 은주를 철딱서니 없다고 무시할 수만은 없다. 허나 만기가 누구인가. 봉우 처도 마다한 신사 중의 신사 아닌가. 처제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처죽일 일이다.

은주 역시 봉우 처처럼 노골적으로 파고들지는 않는다. 결이 다르다고나 할까. 봉우 처가 성욕이라면 은주는 순수한 이성이라고 봐야 한다. 아직은 때가 덜 묻었다.

간호원 홍인숙도 예사 인물이 아니다. 인숙은 봉우 처나 은주처럼 만기에 대해 이성으로 호감을 보이지는 않는다. 이성 대신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월급이 3개월이나 밀려도 싫은 내색도 없이 주면 받고 안주면 말고, 식이다. 조금 여유로운 살림살이가 원인일 수 있으나 그것보다는 만기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예의 바르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꼬박꼬박 저금한 돈의 전부를 쫒겨 나게 생긴 만기를 위해 덜컥 내놓았다. 만기는 행복한 남자인가. 대답은 그렇다, 이다. 모든 여자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남자가 만기 말고 세상에 어디 있으랴.

여기서 추측해 보면 홍인숙 역시 (그런 감정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만기가 손을 뻗으면 마주 뻗어 잡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기와 관련된 세 여자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자. 책은 세 여자는 뒷전으로 밀려 있고 만기와 봉우, 채익준을 앞머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들 세 명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남자가 여자보다 당연히 비중이 높게 다뤄진다.)

재일 먼저 나오는 익준의 인물평을 보자. 작가의 표현 그대로 비분강개파가 제격이다.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목소리를 높인다. 잘못되어 가는 세태가 한심스러워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행동이라기보다는 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병원에서 구독하고 있는 두 종류의 신문을 한 시간 이상 써서 기사는 물론 광고까지 죄다 읽는다. 그리고 나서는

“세상에 이런 죽일 놈들이 있어!” 하고 호통을 친다.

옆에 있는 간호원을 보면서

“미스 홍. 이것 좀 봐요. 이런 주리를 틀 놈이 있어 글쎄!”

그가 분개한 것은 어느 제약회사에서 외국제품을 대량으로 밀수해 인체에 유해 한 위조품을 넣어 수천만 환의 부당이득을 얻었다는 대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법에 의해 이런 악질들이 처벌될 것이라는 인숙의 말에는 즉각 총살해야 속이 시원하다고 대꾸한다. 아예 모가지를 베어서 네거리에 효수하자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대단한 정의감이며 의협심이다. 우리가 못사는 것은 이따위 악당들 때문이라고 핏대를 세운다.

하지만 그는 소리만 지를 뿐 행동은 그에 따르지 못한다. 제 가족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처가 새벽 기차로 인천에 가서 생선을 떼다가 노상의 좌판으로 벌어오는 돈으로 연명한다. 그런 처가 곧 병들어 죽을 판국이다.

봉우는 어떤가. 그는 익준의 패기와는 달리 완전히 주눅 든 사내다.( 그녀의 처가 만기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그녀의 대시는 남편의 무기력과도 연관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이해되고 용서될 만하다는 생각을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익준이 신문기사로 눈이 뒤집혀 길길이 날뛰어도 모른 척한다. 그러나 동태눈에 화색이 돌고 생기가 넘칠 때가 있다. 간호원 인숙이 나타난 경우다.

녀석도 사내라고 성욕 넘치는 부인은 놔두고 다른 여자에 한눈을 판다. 언제나 수면 부족인 것처럼 게슴츠레 한 눈이 간호원을 바라볼 때는 황홀하게 빛난다.

그는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 다닌다. 퇴근길은 물론 전차를 타거나 내려서 그녀 집 앞까지 뒤에서 따라간다. 제발 그러지 말라는 홍인숙의 간청에도 봉우는 그러지 않는다. ( 우리나라 최초의 스토커가 천봉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뿐이다. 말을 걸거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적극적인 스킨십은 없다. 매일 홍인숙의 뒤를 그림자로 따라 다닐 뿐이다. 인숙이 다른 사람의 이목이나 눈치 때문만이라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간호원은 그런 사실을 만기에게 알리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

: 앞서 생선 장수하던 채익준의 처가 병들어 곧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언급했다. 과연 그 이후로 익준의 처는 죽었다.

그 사실을 익준의 어린아들이 만기에게 전했고 만기는 봉우와 함께 익준 처의 장례를 치러준다. 장례비용은 봉우 처에게서 빌린 것이다.

그날 봉우 처는 만기의 건물을 의료기기 상에게 매각했다. 봉우 처는 그런 사실을 알리면서 편지 말미에 추신을 적어 넣었다. 만일 나에게 용건이 있다면 언제든지 다음 번호로 연락하라.

봉우 처는 만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추신을 읽고 만기가 봉우 처에게 따로 연락을 해서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독자들은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시라.

손창섭의 <잉여 인간>의 배경은 한국전쟁 이후다. 소설도 그 이후에 나왔으니 가난하고 힘든 그 시대 분위기를 작가가 작품에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봉우가 무기력하고 잠이 많은 것은 적치 3개월간 겪은 수모 때문이다. 전란 통에 양친과 형제까지 잃었다.

작가에 따르면 이것이 재기발랄한 야심가 봉우에게 모든 일이 시들하게 보이는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내에게 남편다운 관심과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다 전쟁 탓으로 돌리고 있다. 봉우뿐만 아니라 나머지 등장인물 들의 어려운 생활고 역시 그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누가 잉여 인간인가. 남아돌아서 없어도 될 인간은 누구인가. 잉여 인간이라는 말은 원래 이반 투르게네프의 <잉여 인간의 일기> (1850)>라는 책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상주의와 선의에 가득 차 있으나 햄릿처럼 여러 이유때문에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특히 주위의 불의와 어리석음을 깨닫고도 방관자 입장을 고집하는 경우를 말한다. 투르게네프와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안톤 체호프 등도 작품에 이런 내용을 많이 담았다.

손창섭은 192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경험이 있으며 해방 후 귀국해서는 교사, 출판사원 등을 역임했다. 대표작으로 <잉여 인간> 외에 <비 오는 날 등>이 있는데 소설 대부분이 인간에 대한 부정과 가난함, 모멸 등을 주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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