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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23:03 (금)
빈 속에 들어간 그것은 위와 내장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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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속에 들어간 그것은 위와 내장을 자극했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2.14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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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그런 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늑해서 바람도 불지 않고 해는 정면이 아닌 비스듬히 비치는 그런 곳 말이다.

잠깐 과거로 여행을 떠났던 나는 다시 산 쪽으로 발을 옮겼다. 올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그런 자리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산의 초입이라기보다는 산정 가까운 곳에 있었다.

능선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이르자 주변이 확 트이면서 여기저기 작은 섬들이 눈에 띄었다. 섬들은 떨어져 있기도 하고 붙어 있기도 했다. 멀리 있는 섬들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운 곳에는 공장의 굴뚝과 아파트 숲들이 어지러웠다. 가깝다고는 했으나 적어도 배로 30분 이상은 가야 했다. 수면으로 보이는 곳의 거리감은 그렇게 착시현상을 불러 왔다.

저곳은 생존의 현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경쟁의 장소였다. 그러나 이곳은 말 그대로 평화 그 자체였다.

나는 자세를 잡고 웅크리고 누울 만한 곳을 찾았다. 일은 어지간히 끝났고 이 정도의 호사를 누릴 만했다. 이런 저런 아주 가벼운 생각을 했다. 채 이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섬의 기슭에서 언덕 높은 곳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잠시 눈을 부쳤다.

잠은 쉽게 왔다. 그리고 허술한 취침이 그렇듯이 한기를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다행히 멧돼지도 오지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자는 동안 체온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한기를 느끼면서 나는 서둘러서 내려가는 길을 잡았다.

해는 다시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주변은 어두워지려는 기색이 확연했다. 나는 붉은 노을을 잠시 바라보았다. 마치 바닷물이 끊는 용광로 속에 있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해가 수면에 걸렸고 곧이어 미끄러지듯이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즈음 하근찬의 소설 <수난이대>가 떠올랐다. 징용 간 아버지가 끌려간 곳의 어느 섬에서 보는 일몰의 장엄함이 연상됐다.

아버지는 이후 더이상 그런 감상에 빠져들지 못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져 팔 하나를 잃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달리듯이 급하게 나는 하산했다. 내려올 때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텐트 안에서 내일 할 일을 정리하면서 오늘은 늦게 잠을 자도 될 듯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지만 낮잠도 조금 잤고 일도 일찍 끝난터라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가져온 대봉투는 모두 처리했다. 그것을 소형 보트에 옮기기 좋게 한쪽으로 일렬로 정렬해 논 상태이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봉투 안에는 나무토막 같은 것은 일절 넣지 않았다.

오로지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이 전부였다. 비닐류 등은 젖지 않은 것 위주로 정리했고 젖은 것은 한쪽에 잘 마르도록 해 놓고 오후에 치웠기 때문에 일은 힘들었지만 목욕을 한 것처럼 개운했다.

부지런히 몸을 놀려서 일찍 작업을 마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저녁에 눕는 것은 노동하는 사람만이 갖는 특권이었다. 몸은 나른했으나 기분은 매우 좋은 상태에 도달했다.

그래서 작은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술은 내 친구였고 인생의 동반자였다. 그것은 나를 위로하고 채찍질하고 경고하고 주의를 주면서 동시에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저녁을 먹고 시간이 제법 지났다. 소화도 됐고 뱃속도 무언가 새로이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낼 즈음 나는 술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야 술 맛이 더 좋았다. 빈속에 들어가는 알코올은 위축된 위와 내장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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