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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과도기>(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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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과도기>(1929)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1.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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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살던 고향을 떠날 때 사람들은 여기보다 더 좋은 환경을 꿈꾸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고향을 떠나겠는가. 떠날 때 사람들은 갈 곳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 

정착할 곳이 고향보다는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위로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동서고금이 비슷하다. 존 스타인 벡은 <분노의 포도>에서 자본가의 횡포에 쫓겨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조드 일가를 그렸다.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야밤 도주 하듯 떠날 때 가족은 그곳이 낙원은 아니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들려오는 소문도 그렇고 지라시의 내용도 그렇다. 

일당을 많이 쳐 준다고 하니 그들의 발걸음은 바쁠 수밖에 없다. 전 재산을 털어 낡은 트럭에 몸을 실었을 때 차라리 고향을 떠나는 것이 잘 된 것은 아닐까 하는 헛된 욕망을 품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창선이 가족도 조드 일가와 비슷한 상황에 맞닥트렸다. 다만 조드 일가가 고향을 떠나는 것과는 달리 창선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전에 고향을 떠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기 어려워 떠난 고향을 다시 찾는 이유는 성공해서 보란 듯이 돌아오는 금의환향이 아니다. 간도에서 되놈 등쌀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더는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됐을 때 창선이의 선택지는 고향 창리 밖에 없었다. 덮어 놓고 발끝이 향한 곳 고향으로 가는 창선의 여정은 꿈의 땅을 찾아 나서는 조드 일가의 그것과 엇비슷 하다. 가면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한 조각 기대다.

되놈 등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한 예만 들어보자. 조선인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간도의 가장은 먹고 살기 위해 늙은 어미와 아낙과 어린 자식을 두고 벌이를 나갔다 한 스무날 만에 돌아왔다. 

와보니 늙은이는 방에서 얼어 죽고 아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청인이 아낙을 채 간 것으로 보고 남편이 칼을 들고 찾아 나서다 눈 얼음 속에 얼어 죽은 아낙과 아이를 발견했다. 

▲ 창선이가 찾던 고향은 사라졌다. 대신 공장 굴뚝에서는 시꺼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설야는<과도기>를 통해 간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창선이 가족의 비참한 생활상을 전하고 있다.

아낙은 머리에는 강냉이 한 되를 이고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앞에 안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은 발광이 나서 죽었다. 일가족 몰살은 소문만 듣고 고향을 떠나 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의 삶의 단편이다. 

오죽하면 이 겨울에 창선이가 어린 것을 데리고 나왔겠는가. 여기서 조드나 창선이의 오십보백보와 같은 슬픈 사연을 더는 엮고 싶지 않다. (그러니 조드 이야기는 여기서 끝. 궁금한 사람은 고민하지 말고 <분노의 포도>를 얼른 집어 들고 읽기 바란다.)

두만강 푸른 물 대신 얼음을 타고 창선이가 고향 땅을 밟았을 때 그가 생각했던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아주 영 딴판이다. 비록 개똥밭 하루갈이( 소를 데리고 하루낮 동안 갈 수 있는 논밭의 넓이)나 논 두어 마지 살 돈을 벌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향 땅인데 첫머리부터 예상은 빗나갔다. 

입에서 절로 흥타령이 나오기는 꺼녕 막상 돌아와 보니 창선이를 반겨주는 곳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고국산천이 그리워 반드시 돌아가리라는 한때의 생각은 낯이 근질거릴 만큼 부질없었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옛 마을 뒷 고개에 올라가서 내려다본 고향은 한 마디로 처참했다. 아내도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오줌 싼 아기를 업고 있는 등에서는 공장 굴뚝의 연기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정겨운 고향마을 대신 우중충한 벽돌집, 쇠집 굴뚝들이 잔뜩 들어섰고 그 전의 마을은 통째로 사라졌다. 어림짐작으로 저기가 형제바위 저기가 파도가 심한 여울 정도로 가늠해 볼 뿐이었다. 어디 간들 국록을 먹어 사는데 지장이 없을 최면장 댁이나 박순검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 임금인지도 모를 삼백 년인가 오백 년인가부터 있던 마을이었다. 태산같이 믿고 온 고향 땅이며 형의 집은 온데간데없었다. 

부부는 더는 걸을 힘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산목숨이니 살아야 한다. 왜 병대 같이 늘어선 길쭉길쭉한 벽돌집을 지나고 거만스럽게 우뚝우뚝 서 있는 높다란 굴뚝을 거쳤다. 

길에는 검푸른 공장 복에 진흙 빛 감발을 한 조선사람인지 일인인지 모를 사람들이 바쁘게 쏘다니고 허리를 질끈 동여맨 청인들이 왈왈 떠들면서 지나간다. 모든 것이 영 낯설다. 

멀리서 흰 옷 입은 사람 하나가 다가오자 창선은 창리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본다. 험상궂은 사람들 틈에 그래도 조선사람을 만나니 반갑다. 저 너머 구룡리로 갔다는 대답. 

창선이가 고향을 떠난 것이 4년 전인 것을 감안 하면 그 직후에 고향은 변화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흙냄새, 고기 냄새, 불어오는 바람 냄새 모두 고향 것이 아니다.

창선 내외는 그래도 희망을 가져 본다.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이야 설마 슬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정 안되면 노동이라고 해먹을 생각이다. 

구룡리라면 사촌 고향쯤 되는 곳으로 창선이도 알고 있다. 사방은 어둑어둑해지고 부부는 다시 길을 재촉한다. 철길로 끊어진 구룡리에서 창선은 마침내 형이 살고 있는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늙은 어머니를 만나 자초지종을 듣는데 간도나 이곳이나 피장파장이다.

: 되놈 등쌀이나 일본놈 등쌀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다. 소수레 끌고 고깃배 드나들던 고향은 더는 고향이 아니다. 

창선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잠시 넋을 잃었다. 옛일을 더듬어 본다. 고기가 제법 잡혔던 바다와 그 바다에서 개눈깔 사탕을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의 아낙에게만 주면서 씹어 먹지 않고 누가 오래 녹여 먹는지 내기를 하면서 연애하고 결혼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그 아낙에게만 고기를 덤으로 주면서 둘만이 알 수 있는 눈짓을 교환했던 정든 고향, 친한 바다는 다어디로 갔는가. 산도 그렇고 물도 그렇고 길도 철길이 갈라놓았다. 대신 쇠냄새 나는 대기와 거만하게 늘어선 공장의 벽돌집이 호령하듯이 서 있다. 

농군은 산비탈 으슥한 곳으로 밀려나고 노가다는 떼로 몰려다닌다. 땅은 석탄 먼지로 검게 쩔고 배따라기 소리 요란하던 포구는 파도 소리만 들린다. 땅도 바다도 창선이 보기에 모두 죽었다. 

파수를 보던 오래된 소나무도 늙은이 앞니처럼 몽땅 빠졌다. 되놈의 등쌀을 피해서 되놈 땅에서 생선을 못 먹어 고향에 왔는데 고향의 꼴이 이렇게 변했다. 부부는 서로를 보면서 할 말이 잊었다.

어렵게 형 집을 찾았다. 앓아누워 있던 어머니는 죽지 않으면 만난다고 창선 내외를 보더니 벌떡 일어난다. 간도에서 나았다고 이름도 간남이인 손자를 안아 반기는 할머니의 마음은 그러나 잠깐이다. 

대신 근심이 그곳을 채운다. 여기라고 간도보다 상황이 나을게 없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을 쫓아낸 회사는 애초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 토지를 매수할 때는 구수한 풍설로 인천만 한 항구를 만들어 준다, 시장, 학교, 우편소, 큰길 다 내준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다 이주하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씻었다.

순진한 주민들은 회사에 속아 넘어갔다. 야바위도 이런 야바위가 없었다. 조선 가면 아무 일이라고 해 먹으려 했으나 그 아무 일은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일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고 힘을 쓸래도 쓸 곳이 없고 고기도 잡아먹을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현실. 

창선의 눈길은 허공을 맴돈다. 게트림을 하면서 사람을 부르는 절대명령, 꿈도 안 꾸던 뚱딴지 같은 일터가 제 맘대로 펼쳐져 있다. 

화전이나 할까 생각했으나 다행이도 창선이는 공장 노동자로 뽑혀 상투를 자르고 감발을 치고 부삽 들고 콘크리트 반죽하는 생소한 사람으로 변신했다. 과도기의 공포와 설움이 그의 가슴을 마구 쑤시고 있었다.

<과도기>의 작가 한설야는 함흥 출신으로 조선말에 군수를 지낸 부친 덕분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부친 사망 후 살림이 어려워지자 1925년 만주로 이주했고 거기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관심을 두고 귀국해서는 카프에 가담했다. 

1934년에는 진보적 문화 운동을 전주에서 펼치다 체포돼 백철, 김기진 등과 함께 옥살이를 했다. 해방 후에는 월북해 그곳에서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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