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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무녀도>(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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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무녀도>(1936)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1.1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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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 때 푸닥거리는 생활의 일부였다. 몸이 아파 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면 으레 무당은 굿을 했다. 방학 때 서울의 먼 친척 집을 찾을 때도 그랬다.

화려한 옷을 입거나 날이 선 작두를 타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올 때면 나는 오금이 저렸다. 무슨 무슨 살이 끼었으니 그것을 풀어야 한다며 졸린 나를 자지 못하게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상에 놓인 쌀을 한 움큼 집어서 던지기까지 했다. 정말로 짜증이 ‘지대로’ 몰려오던 때였다. 그래도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지 못했다. 무당에게는 무언가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고 대들었다가는 더 큰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녀는 살가운 어른이기보다는 무섭고 피해야 할 존재였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쥐구멍을 찾던 주눅든 눈빛은 오십 중반을 넘긴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무당( 제대로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옷도 그렇고 주문을 외는 것도 그렇고 좀 어딘지 어린 내가 봐도 어설펐다. 그러나 그것이 신험한 효력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다.)은 8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듯싶다.

그렇게 추측하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어느 날 부터인지 집에서 더는 굿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무당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다만 어머니가 전해주는 소식을 한 귀로 흘려들었을 뿐이다.

우리 집 뿐만 아니라 무당을 찾는 수요는 마을에서 급감했다. 사람들은 무당을 부르기 대신 읍내 병원에 갔고 주문을 외는 대신 약을 먹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흑백 텔레비전에 앞에 모여들었다. 칼라 티브이가 마을에 보급됐을 때 그녀는 찾는 발길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삶을 마감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웃 마을에 살기도 했거니와 행적을 알고 있을 어머니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은 이유는 한때 신실했던 믿음을 가졌던 어머니에 대한 배려였다. 사라진 믿음을 다시 소환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지막은 화려하기보다는 초라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무속인 모화와 예수교를 믿는 아들과의 신앙대결은 두 모자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다. 표면적으로는 아들이 승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화 역시 지지 않았다. 모든 것에 귀신이 있다는 그녀의 믿음을 결코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몇푼에 행차를 했지만 자신의 신적 능력을 과신했던 그녀가 그것이 의심받았을 때 받았을 충격을 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쌀을 던지고 나서 그녀는 언제나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내일이면 감기가 싹 낫는다고 걱정말라고 했던 말을 나는 기억한다. 열도 떨어지고 목 아픈 것도 나아 밥도 잘 먹게 된다는 그녀의 말. 그 말은 엄중했고 단호했으며 확신에 찬 것이었다.

그러면 정말 다음 날에는 좋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굿을 했음에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되레 열이 펄펄 끓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무당이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당의 ‘신험’이 빗나갔다는 소문이 퍼지면 나에게 닥쳐올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더 세게 쌀 주먹을 내게 던질 것이고 화난 얼굴로 쏘아보면 잠자리가 뒤숭숭하고 꿈에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물수건을 머리에 대주는 어머니에게 나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고 실제로 며칠 고생했으나 결국 나았고 그 공은 고스란히 그녀, 무당에게 돌아갔다.

한번은 무엇을 잘 못 먹었는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고 가려움 때문에 박박 긁어 손톱 밑에 피가 묻어났다. 집에 온 무당은 오자마자 내 몸을 훑어보더니 굿 대신 전혀 뜻밖의 처방을 내렸다.

칡덩굴을 허리에 감고 마당을 세 번 돌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때는 여름이었으므로 칡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옷을 벗고 칡을 두르고 마당을 돌 때 모기들이 극성이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일 것이다. 그때 나는 이것은 미친 짓이라고 단언했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무당을 외면했고 그녀가 갈 때 친근하게 인사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와 무당과의 대략적인 마지막 장면이었다.

장황하게 서두가 긴 것은 김동리의 <무녀도>를 읽으면서 자꾸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무당과의 인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인공 모화는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무당이다. 나 어릴 적 무당과 모화를 비교하면 모화가 확실히 우위에 있다. 이것은 나 어릴적 무당을 깔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화의 복장과 주문과 행동거지를 통해서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다.

경주에서 오리쯤 떨어진 집성촌 마을에 사는 모화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다. 딸의 이름은 낭이이며 아들은 욱이다. (아들 욱이는 모화가 아직 신내림을 받기 전에 낳은 사생아다.) 딸이 열일 곱이고 아들이 열아홉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모화의 나이는 40 중후반이나 50대 초반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자식이 있으니 당연히 남편도 있겠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모화는 남편과 아들과는 떨어져 있고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사는 집은 깔끔하지 않다. 지렁이와 두꺼비는 물론 늙은 개구리가 상주해 있다. ( 모화가 왜 집을 청소하지 않고 도깨비 집 마냥 방치했는지 그 자세한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퇴락해 가는 집과 모화의 운명을 병치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였는지 모른다. 그도 아니면 굿이 없는 날에는 늘 술을 먹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딸 낭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늘 쌍 집에만 박혀서 그림을 그린다.( 제목의 <무녀도>는 낭이가 그린 그림이다.)

무당의 굿은 영험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마을에서는 모화를 찾았다. 그러면 모화는 신이 나서 굿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떠난 욱이가 10년 만에 찾아왔다. 모자는 뜨거운 상봉을 했다.

욱이는 집에 머물면서 올 때 가져 온 신약전서를 주문처럼 읽었다. 그는 평양에서 불교나 신선도나 동학도가 아닌 예수교를 믿는 신자가 돼서 돌아온 것이다.

자, 이야기 전개는 점점 흥미를 끌고 있다. 모든 것에 귀신이 있다고 믿는 모화와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유일신만 믿는 예수교가 만났다.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모화는 서양 귀신에 들린 아들의 성경책을 불태운다. 이 와중에 칼춤을 추던 모화의 칼에 아들이 세 번 찔리고 죽는다. 어미의 칼에 맞아 죽는 아들처럼 비극적인 죽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모화가 제정신이겠는가. 섬기는 신앙이 달랐어도 피로 맺어진 모자간의 정을 어찌 잊으랴. 그즈음 모화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그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눈은 파랗고 콧대는 칼날 같은 선교사를 구경하는 것은 원숭이 구경보다 더 신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교회는 돈도 받지 않았다. 예수교가 들불처럼 번져가면서 모화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모화의 시대는 저물어 갔다.

그때 일거리 하나가 들어온다. 모화는 죽은 김씨 부인의 넋을 건지는데 혼신을 기울인다. 예수 귀신보다 자신이 믿는 귀신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화는 한 방울의 피까지 짜내면서 굿판을 벌인다.

그러나 넋은 쉽게 건져지지 않는다. 모화는 강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모화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 후 마을에는 예배당 즉 교회가 세워졌다. 멀리 떠난 늙은 아비는 낭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 모화가 죽었고 교회가 성업이다. 모화가 예수에 진 것이다. 완패다. 토속신앙이 기독교와 싸워 이긴 전례가 세상 어디에 있던가. 스펀치처럼 스며들어 하나하나 잠식해 나가는 교회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성경과 피아노와 교회와 평등과 사랑을 무기로 들고 오는데 무당의 굿판이 이겨낼 도리가 없다. 그러나 모화는 죽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버리기보다는 철썩 같이 믿었다. 교회 귀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들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무속인이지만 그는 그것을 미신으로 치부했다. 어머니를 설득해 예수교로 끌어들이고 싶었으나 어미는 넘어가지 않았다.

어미와 아들이 토속신앙과 서양 귀신을 놓고 신앙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섬뜩하다. 전도하려는 아들과 거부하는 어미가 세 대결을 펼친다.

결국 승자 없이 둘 다 패배자로 남았다. 아니 아들은 순교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아들이 이겼다. 더구나 성경을 전파할 교회까지 세워졌으니 어미의 종교는 서양종교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화의 완전한 승리를 주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속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 끝내 죽는 과정은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모화가 하나가 됐다는 즉, 접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화가 신의 위치에 올랐다면 모화는 패배자가 결코 아니다.

1936년 중앙지에 발표된 김동리의 <무녀도>는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발간될 때 크게 수정됐다가 1978년 장편소설 <을화>(乙火)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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