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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더블린 사람들-이블린>(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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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더블린 사람들-이블린>(1914)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8.1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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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밖을 볼 때 여자는 상념에 잠긴다. 때는 저녁이다. 무언가 그리움 같은 것이 울컥 몰려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인적이 드무나 간혹 아는 사람이 지나간다. 지난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린 시절, 동네의 공터에서 놀던 때가 그립다.

그때는 엄마도 살아 있었다. 그리운 엄마 생각에 갑자기 피곤이 몰려 왔다. 그러나 생각의 끈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그녀는 눈을 돌려 방안을 둘러 본다. 집이다. 나의 집이며 나의 방이다. 19년을 여기서 살았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익숙한 물건들과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제는 영영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망가진 풍금 위에 있던 빛 바란 사진 속 주인공의 얼굴도 더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거칠었고 짠돌이였다. 어릴 적에는 여자애라고 손찌검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네 어머니만 아니면 너를 어찌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맞을 것 같은 위협에 그녀는 몸을 사렸다.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은 이 집안에 아무도 없다. 어니스트는 죽었다. 해리는 교회 장식업 때문에 늘 지방에 가 있다. 그녀는 떠나기로 작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밖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그만두면 직장은 구인광고로 다른 사람을 채울 것이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동료는 좋아할 거라고 여겼으므로 직장 문제도 걸릴 게 없었다.

그런데 이블린은 조금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유언처럼 한 말이 발목을 잡고 있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집안을 지키겠다는 약속. 하필 이 순간에 그 일이 떠오른 것은 귀에 익은 노랫가락, 길 저 아래쪽에서 들여오는 손풍금 소리 때문이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도 그 소리 때문에 변심하지 않았던가. 결정적인 순간에 음악은 인간의 심성에 변화를 일으키는 모티브로 작용한다.)

 

이 집에서 살았던 시간이 완전히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녀 아닌 누구라도 머리를 한두 번 흔들 수밖에 없다.

부두에는 프랭크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새로운 삶을 설계해줄 프랭크는 매우 친절할 뿐만 아니라 속이 트인 사람이었다.

술에 취해 폭력을 쓰고 월급봉투로 실랑이를 벌이는 밴댕이 소갈머리 아버지와는 달랐다. 프랭크와 함께 또 다른 삶을 살려고 이블린이 지금 집을 떠나려고 한다. 그러기 전에 창가에 앉아 창밖 풍경을 보면서 자신이 살았던 집과 집에 얽힌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블린은 프랭크와 첫 만남과 그가 오페라 보헤미아 소녀를 보여준 것을 생각 속에서 끄집어냈다.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주고 여자로 사랑해 주는 그가 그녀는 더없이 좋았다.

그런 프랭크를 아버지는 “뱃놈들이란 게 뻔해”라고 한마디로 하찮게 보았고 어느 날은 체면은 생각지도 않고 프랭크와 다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뻔한 그 뱃놈이 아버지보다 백배, 천 배 더 좋았다. 그래서 그가 정착한 아르헨티나로 가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얼마나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이름인가. (그곳에서 탱고 춘다면 좋을 것이다.)

지상낙원은 아니더라고 충분히 그녀가 새로운 삶을 꿈 꿀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녀는 이제 일어서야 한다. 더 늦으면 배를 탈 수 없다.

그가 들려주었던 마젤란 해협과 무시무시한 파타고니아 사람들의 이야기는 ( 그곳의 역사를 기회 되면 알아야겠다. 여행사 직원은 그곳은 내가 가본 곳 중에서 최고라고 추천했었다.)나중에 떠올려도 될 것이다. 그녀는 일어서다 말고 무릎 위에 놓인 편지를 내려다본다.

한 통은 해리에게, 다른 한 통은 아버지에게 쓴 편지였다. 죽은 어니스트가 더 좋았지만 해리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그렇게 나쁜 사람만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갑자기 확 늙어버린 아버지도 한때는 다정했었다. 그녀가 아파 누워 있을 때 유령 이야기도 들려주었고 뜨거운 난로에 토스트를 구워 주기도 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언덕으로 소풍도 가기도 했고 웃기려고 어머니 모자를 썼던 기억도 있다.

그런 기억이 그녀를 창가에 더 붙잡아 메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비참한 삶을 떠올리자 더 머무를 수가 없다. 그녀는 도망치기로 작정한 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부두로 향했다.

나머지는 프랭크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다. 이 순간 이블린에게 구원자는 신이 아닌 프랭크였다.

선착장에는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프랭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문득 그녀의 눈앞에 검은 덩어리 같은 선박에 들어왔다. 이블린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번민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 기도라는 것을 했다. 가는 것이 도리인지 남는 것이 그런 것인지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신을 찾았다. 뱃고동이 길게 울렸다. 더는 망설일 수 없다.

가자, 프랭크가 그녀의 손을 끌었다. 그때 그녀의 가슴에 종소리가 뗑그렁 울렸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몸은 구토를 일으켰다.

세상의 모든 바다가 그녀의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든 이블린은 난간을 부여잡고 잡아끄는 프랭크에 저항하고 있다.

안돼, 난 갈 수 없어.

이블린은 비명을 지르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블린을 부르는 프랭크의 목소리는 크고 애절했으나 그녀는 묶인 짐승처럼 대답할 수 없었다. 미지에 대한 공포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창백한 얼굴을 겨우 그에게로 돌렸으나 그녀의 눈빛엔 사랑이나 이별 혹은 그를 알아보는 아무런 기미도 없었다. 이블인의 굴복.

: <이블린>은 1914년 간행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의 단편집에 실린 15편 가운데 하나다.

대표적 단편은 아니나 주인공 이름이 제목인 유일한 작품이며 고뇌와 좌절과 고통을 그린 초기 제임스 조이스의 주목할 만한 작품인 것은 틀림없다.

나는 <이블린>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생각했다. 꽃을 사러 가면서 이것저것 상념에 젖은 부인의 일상이 이블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투영됐다.

주저앉은 이블린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 전과 같은 생활을 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동료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게로 출근을 하고 못난 아버지의 삼시 세끼를 챙기면서 아버지의 광기로 더욱 피폐해진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왜, 감옥을 탈출해 신천지와도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에 오르지 않았을까.

프랭크라는 듬직한 남자의( 현재까지는 그렇다. 그가 거기에 도착해서 현재와 다르게 몸과 마음이 변할지는 모른다. 나는 그런 것도 궁금하다. ) 품에 안기는 대신 왜 짐승에 가까운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을까.

어머니의 유언과도 같은 지킬 수 있을 때까지 가정을 지키라는 말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는 이블린의 절망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블린이 회상하는 바에 따르면 죽기 전의 어머니는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절망을 부수지 않고 그녀는 왜 뒤를 이을 생각을 했을까. 이블린을 통해 제임스 조이스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읽고 나면 무언가 완성됐다는 후련함보다는 떨쳐 내지 못한 묵은 찌꺼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느낌이다. 불쌍한 이블린이 더욱 가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식민지 아일랜드인의 무기력을 <이블린>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프랭크와 떠나는 것은 식민지를 탈출하는 것이고 암담한 현실을 뛰어넘는 행위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이블린을 주저앉게 했다. 길이가 아주 짧은 단편이나 읽고 나면 가슴이 답답하고 여름날의 열대야처럼 아래로 축축 처진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사람들의 편린을 모은 <더블린 사람들>에 실린 단편들은 <이블린>처럼 어렵지 않다.

제임스 조이스가 난해한 작가라는 평가를 무너뜨린다. 이런 기분으로 <율리시스>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그의 작품 세계로 풍덩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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