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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3 15:38 (화)
85. <날개>(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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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날개>(1936)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7.2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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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이것은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맨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먼저 적은 것은 <날개>가 어렵다거나 이상한 작품이라는 선입견을 없애버리기 위해서다. 나 역시도 (어떤 이유 때문인지) 그런 생각 때문에 정독하기를 꺼려 왔다.

그러나 막상 잡아보니 난해하지도 어렵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독자들도 한 번 읽어 보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겠다.

먼저 나라는 인물을 추적해 보자. (왜냐면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적어 놓았으니까,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기 위해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나는 육신이 흐느적거릴 만큼 피로했을 때만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다. 그런 나는 아내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당연한 것을 말한 것은 아내는 나와는 여러모로 대칭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점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내가 사는 곳은 유곽 냄새가 나는 33번지( 남녀 성교 자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로 18 가구( 이 역시 성적인 의도가 있는 쌍스러운 표현이라고 한다.)가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곳이다.

낮보다 밤이 화려한 이곳에서 나는 그들과는 아무와도 놀지 않고 인사도 않는다. 오로지 아내와만 알은체할 뿐이다. ( 이렇게 하는 것은 아내 낯을 보아 좋지 않은 일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다.)

이곳에서 아내는 제일 작고 제일 아름답다. 한 떨기 꽃이다.

아내와 나는 각방을 쓴다. 아내는 볕이 드는 아랫방을 쓰고 나는 그 방을 지나면 나오는 윗방을 쓴다. 장지를 사이에 두고 나와 아내는 이렇게 방을 둘로 나눴다. 아내 방은 작은 볕이라도 들지만 내 방은 종일 해가 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 방에서 마음에 드는 옷처럼 만족을 느낀다.

이곳에서 종일 뒹굴고 잠을 잔다. ( 잠만 자는 것은 아니다. 되레 생각은 깊다. 아마도 나는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하기보다는 연구에만 능숙한 지식인으로 보인다.)

아내가 외출하고 나면 나는 얼른 아내의 방으로 건너간다. 화장대를 비치는 볕을 보고 돋보기 장난을 하거나 아내의 손잡이 거울을 가지고 놀고 늘어놓은 가지각색의 화장품을 들여다보다 병마개를 열고는 냄새를 맡아보고 아내의 체취를 느낀다.

아내의 방은 돌아가면서 못이 박혀 있고 화려한 옷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 반면 내방은 못 하나 없고 옷은 단벌이다.)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한 번도 갠 적이 없는 이불을 덮고 낮잠을 잔다. ( 나는 잠의 왕이다. 수시로 자고 나서도 또 자고 밤에도 잔다.)

 

이렇게 잠을 많이 자니 어떤 날은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때는 또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아무 제목이나 골라서 연구랍시고 머리를 굴린다.

발명도 하고 논문도 쓰고 시도 많이 지었으나 잠이 드는 순간 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진다. ( 이런 경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한두 번은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도 오래가지 못했다. 적극적인 사색을 피한 것은 아내의 꾸지람을 들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게으른 성격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기는커녕 될 수만 있으면 인간의 탈을 벗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다.

아내는 하루에 두 번 세수를 하면서 가꾼다. (하루에 한 번도 씻지 않는 나와는 정반대다.) 아내의 외출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밤에 외출할 때는 더 좋고 더 깨끗한 옷을 입을 나간다.

그런데 나는 아내가 어디로 외출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외출하지 않을 때는 집으로 찾아오는 내객이 많다. ( 내객은 남성이다.)

아내에게 손님이 찾아오면 나는 온종일 방안에만 있다. 아내의 방에 가지 못하니 불장난도 못하고 화장품 냄새도 맡지 못하고 이불을 쓰고 누워만 있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이런 날은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나에게 돈을 준다. 오전 짜리 은화다. 돈을 받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주는 족족 쌓아 둔다. 모아둔 돈은 아내가 준 벙어리 저금통에 넣는다.

아내는 오늘도 내객을 받는다. 내객이 많을 때는 괴롭다. 귀 기울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듣는데 부부간에도 하기 어려운 농을 서로 지껄일 때도 있다. ( 아내는 물론 내객들도 내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

아내가 내객과 수작을 부릴 때 나는 내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또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끝내 아내의 직업을 알아내지 못한다.

아내는 돈이 어디서 나는지 언제나 돈이 있다. 나는 말라 갔고 영양부족으로 몸뚱이 곳곳이 뼈가 불쑥불쑥 내밀었다. ( 그럴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살찐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아내가 나에게 돈을 줄 때는 쾌감을 느낀다. 어느 날 나는 아내가 준 돈을 변소에 버렸다. (이유는 묻지 말자. 내가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은 독자들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아내가 밤 외출을 할 때면 틈을 내 나도 외출을 한다. 돈 오원을 넣고 나왔지만 쓰지는 않고 여기저기 싸 돌아다니다가 피로에 지칠 즈음 겨우 집으로 돌아온다. 와서는 아내가 다른 내객을 맞고 있지 않는지 여간 조바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아내는 늘 내객을 받고 나는 늘 아내의 눈치만 본다. (직업도 없고 돈벌이도 없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아내에게 기생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각이라는 것을 늘 하면서 나의 존재와 아내의 존재 이유를 고민한다. 그러나 해답이 있을 수 없다.

나와 내 아내의 결말 또한 나오지 않는다. 이상한 소설이다. 이런 소설은 그 이전에는 없었으므로 모더니즘 소설의 선두주자라고 평자들은 논한다.

: <날개>는 한마디로 매음을 해서 돈을 버는 아내와 그 아내에게 사육되고 있는 남편의 이야기다.

한 번도 아내의 남자였던 적이 없던 남편인 나를 통해 나와 아내의 관계를 조명한다. 몸파는 아내나 아무할 일이 없는 나의 관계가 순조로울 수는 없다.

나는 늘 자고 간혹 외출을 한다. 외출할 때는 경성역의 커피숍을 들른다.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도 건재하다. 전시회도 열린다. 주인공이 들렀던 2층 대합실의 커피숍은 사라졌지만 그 옛날의 흔적은 여전하다.)

아내는 언제나 내객을 만나고 만나지 않는 날은 밖으로 나간다. 아내가 준 돈을 다시 아내에게 줄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은 아내가 내객에게서 돈을 받을 때 느끼는 그것과 진배없다.

어느 날 아내는 오늘 밤은 어제보다 좀 늦게 들어와도 좋다고 해서 나는 외출했다.

비를 흠뻑 맞고 감기에 들었다. 아내는 아스피린을 주었으나 실제로는 최면제 아달린 갑이었고 나는 이것은 좀 심하다고 여기면서 산을 찾아 올라갔다.

인간 세상의 아무것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내와 연관된 것은 생각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를 죽이려는 짓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부리나케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매무새를 풀어 헤진 아내의 모습을, 절대로 내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아내는 내 멱살을 잡았고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성난 아내는 내 살을 물어뜯고 도둑질하러 다니느냐, 계집질하러 다니느냐고 몰아부쳤다. 그런 아내를 남자가 덥석 안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억울하나 대항 대신 줄달음쳐 집 밖으로 나왔다. 경성역을 들렀다가 어딘지도 모를 곳을 쏘아 다니다가 미쓰꼬시(종각에 있던 백화점 이름) 옥상에 올라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주저앉아 내 스물여섯 해를 회고했다.

그러나 자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는 어려웠다. 금붕어를 보다가 오탁의 거리를 보다가 아내와 나는 숙명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때 정오의 사이렌이 뚜 하고 울렸다. 갑자기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리.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외쳐 본다.

날개여 다시 돋아라.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이상의 본명은 김혜경이다. 천재와 광인으로 알려졌다. <날개>를 통해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최초로 심리주의를 문학작품에 도입했다.

1937년 사상적 이유로 일제에 체포돼 수감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그해 26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이상의 연인이 기생 금홍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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