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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결혼이야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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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결혼이야기 (1992)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6.1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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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에는 혼전 이야기는 없다. 유추해 보건데 두 사람은 여러 차례 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가족 간의 트러블도 있었을 것이다. 떨어져 있으니 그리워서 다시 만났다.

결혼은 우리끼리 하는 거지 가족이 하느냐고 두 사람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들 역시 부수적이라면서 이겨냈다. 모든 결혼에 이르는 남녀처럼.

숱한 ‘밀당’을 끝에 도착한 위대한 결혼은 그래서 해피 했느냐고. 결론만 놓고 보면 그렇다. ( 스포일러 오지다고? 개봉 영화도 아닌데 그러면 좀 어떠냐는 심정. 그리고 영화평은 자고로 친절해야 한다고, 그것도 너무 그래야 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기 때문에 스포일러 그런 것쯤은 가볍게 무시한다.)

그러나 행복의 과정은 너무 어렵고 험난했다. 그래서 더 값진 결말이었을지 모른다고? ( 제발 그러지 말기를 바랐다. 그런다면 웰메이드가 아니라고 보는 내내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우려는 현실이 된다는 가정처럼 정말 그렇게 됐다. 그런데도 혀를 차기보다는 좋다고 맞장구친 것은 신파라고 마냥 몰아부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태규(최민수)와 지혜(심혜진)는 신혼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잠자리다. 눈빛만 마주쳐도 그것이 생각나는 혈기 왕성한 남녀다. 마누라 없는 곳이 천국이라거나 내 꼴 보고도 결혼하느냐는 기혼들의 비아냥쯤은 가볍게 무시한다.

그러니 성혼 선언문 낭독이나 하객들의 박수나 받고 했던 결혼 당일의 풍경은 두 사람에게는 한심한 날로 기억될 뿐이다. 그런 찌질한 과정을 거치고 합법적인 부부가 됐으니 이제는 합법적으로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다.

그럴 때 두 사람은 아주 행복했다. 행복이 넘치면 어떻게 된다고? 불행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하는 것도 그렇지만 두 사람의 성격 역시 완벽하지 못했다.

그러니 좋다가고 어느 순간 티격태격이다. 아주 유치한 것으로 화를 낸다. 처음에는 화를 내고 쉽게 풀린다. 그러나 차츰 풀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좋게 끝났던 것까지 손해 본 것 같아 어느 순간 복수의 기회만 노리게 된다.

 

그 일만 해도 그렇다. 남자는 지금이 적기인데 여자는 아니라고 우긴다. 남편이니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해도 아내는 아니라고 거부할 때 이것은 다툼의 씨앗이 된다.

이런 속상한 기분이 이어지면 조준 실패에 따른 화장실 사용법으로 싸움이 번진다. 물 튀기며 하는 샤워나 치약을 가운데서부터 짜는 것도 시빗거리가 된다.

세면대의 머리카락이나 헤어드라이기 사용도 신경 쓰인다. 이럴 때면 결혼은 진열장의 구두처럼 보기엔 그럴듯하다는 구두닦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그래도 이런 일들은 낮에 일어나니 그나마 다행이다. 밤일은 낮의 아쉬움을 한 방에 날리고도 남기 때문이다. 신혼이란 아직 신선한 생선과 같은 것이니까.

티격태격하다가도 한 침대에 누우면 결혼은 안 하느니보다 하는게 낮다고 빙그레 웃을 수밖에. 강변으로 드라이브가서 혹은 방송국 화장실에서도 그 짓에 열을 올린다. 한다, 못한다 실랑이를 하지만 그것은 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기 위한 달콤한 전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밤의 일도 시원치 않다면 말은 달라진다. 개구리 뒷다리 타령을 하면서 보양식에 관심을 가질 때면 여자는 잠자리에 시끈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디 남자는 그런가. 아직은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오직 할 수 있다는 혈기왕성만 있으면 된다고 잔머리를 굴린다.

이때쯤 여자는 손익계산을 따진다. 결혼해서 이득보다는 손실이 많으면 조금씩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한다. 여기선 여러모로 ‘난 노예다라’ 는 말이 뇌 근처에서 떠돌면 결혼은 비상등이 켜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침대처럼 나도 가구의 일종 아닌가 하는 철학적 망상에 빠져들면 막장으로 치닫는 것은 시간문제다. 대주기만 하는 빨래판 신세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을 때면 왜 결혼했지?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온다.

남자들의 관심사는 오직 그것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판단을 내리면 여자는 어이가 없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봉사한다고 할 때면 이제부터 그럴 필요 없다고 쐐기를 박는다.

그것은 달리기나 축구경기가( 20세 이하 남자 축구가 결승에서 아쉽게 패했다. 그것만도 장하다고, 다음에 우승하면 된다고 해도 마냥 아쉽다. 아닌 밤중에 축구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 글을 쓰기 몇 시간 전에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1:3으로 패해 준우승했기 때문이고 그 여운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아닌데도 남들과 비교하는 꼬락서니가 한심할 따름이다.

지혜의 말을 따르면 그것은 개뼉다귀에 다름 아니다. (그래도 할 말이 더 있다고 대들면, 이렇게 대꾸하면서 끝장을 본다, 더 말하고 싶지 않아, 내가 원하는 것은 혼자 있겠다는 거야, 알겠어? 라면서 쏘아보는 눈빛이 흉흉하다. )

이쯤에서 남자가 다리 사이로 꼬리 감추는 애완견이면 좋으련만. 꼴에 남자라고 너 맞고 싶어, 한 대 맞을래? 하면서 주먹을 치켜든다. 억울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이런 현실이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을 때 여자는 울 수밖에 없다. 울면 남자는 조금 누그러진다.

봉사라는 말 미안하다고 뒤늦게 사과한다. 섹시한 당신은 (봄비처럼)그걸 무척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여자에게 핑계를 댄다. ( 그 와중에도)

어쩌니, 어쩌니 해도 이때 까지만 해도 사랑이 깨질 거라고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팔벼개를 하고 누워있다가 또 그 일을 치르고 그러고 나면 그런대로 결혼은 괜찮은 선택지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예를 들면 치약을 가운데부터 짠다고 해서 흰자위가 돌아갈 정도로 버럭 화를 내거나 닭 대가리 하고 모욕을 하게 되면 저놈의 주둥아리,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저급한 단어가 마구 뛰어나온다.

쇼핑이 서너 시간을 넘기면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그런 표정과 그런 말을 여자가 당연히 눈치채도록 노골적으로 말하면 여자 역시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한심한 남자라고 낙인을 찍는다.

그날 저녁이 순조로울리 없다. 남자는 풀어 보려고 그러는지 아니면 그냥 하고 싶어서 그러는지 치근덕대나 여자는 생리 운운하면서 아프다고 돌아눕는다.

낮의 화에 저녁의 울화까지 더해지면 화는 배가 되고 드디어 폭발한다. 언제 안 아픈 적 있었니? 두통약 선전에 여자 투성이라는 성적 비하의 말까지 더해지면 침대의 반은 내 것이라는 아주 유치한 말로 맞받아친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그렇게 점잖고 이해심 많고 으젓할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불만과 불평의 상담을 유려하게 해석하고 풀어 놓는데 이들이 과연 아까의 그들인지 의아하게 된다.

집에만 오면 둘은 신사 숙녀에서 하나같이 저질이 된다. 악마의 말을 서로에게 마구 지껄여 댄다.

허세 한심 불쌍 같은 단어들과 그러다가 이제 떨어지자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건 자연스럽게 나오고 그래? 그렇다면 나도 오케이 하고 둘은 그렇게 하기로 작정한다.

방송국 복도에서 만나서는 화장실로 직행해 응 응 응하기보다는 서로 모른 척 지나간다. 오뉴월인데도 찬바람이 인다.

아내는 잘나간다.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런 아내가 남편은 아니꼽다. 퇴근길에 남자 피디의 차에 올라타는 아내는 행복해 보이고 급기야 영화출연 제의까지 받자 남자는 너하고는 진짜 말이 안 된다고 언성을 높인다.

사돈 남말하네, 여자도 지지 않고 받는다. 급기야 주먹질이 오간다.

남자는 강제로 여자와의 관계를 시도한다. 거칠게 더 거칠게. 네가 원하는게 이거 아니었어. 뭔가 강렬하고 짜릿한 거. 늘 품고 있었는데 뭘 망설여, 내가 죽여주마 하고 대든다.

그래봤자 2분짜리, 번개불에 콩볶기. 이 한마디에 남자는 쪼그라들고 나레이션은 말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하느니, 마느니 망설일 때가 있다고. 피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고. 서로 증오하고 있다고.

여자가 커다란 화분 두어 개와 곰 인형이 실린 트럭을 타고 떠난다. 굿바이. 깔끔하다. 여기서 영화가 끝나도 좋았다.

그런데 아직 러닝타임은 남아 있다. 찌질한 남자는 그러나 기분이 좋다. 가운데 눌러 짠 치약을 밑에서부터 위로 조심스럽게 밀어 올린다. 진작에 이랬어야하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남자도 진짜로 헤어지기를 원했나 보다.

한동안 둘은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혼술남녀. 그러다가 우는 남자. 다방에서 재회하는 남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서로 칭찬한다. 지혜가 그 정도인 줄 몰랐다, 태규씨의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서가 더 인기 있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이미 둘의 사랑은 식었다.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고 더는 날 괴롭히지 말라는 말은 작별인사다. 남자는 지방 근무를 자청한다. 그리고 떠난다. 새 구두 사기도 전에 헌 구두를 버리지 말라는 구두닦이의 충고도 무시한 채.

그리고 차 안에서 여자가 하는 방송을 듣는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실망한 뒤 이혼했다는 뭐 그런 내용. (남자가 보냈나?) 그녀에게 불만이 없고 부끄러운 기억뿐.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회상한다. 허둥지둥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는 남자가 떠난 곳으로 바람처럼 달려간다. 공동묘지에서 둘의 재회.

국가: 한국

감독: 김의석

출연: 최민수, 심혜진

평점:

 

: 여자가 방으로 남자를 찾아갔을 때 커튼이 내려진 빈집은 스산했다. 이때 갑자기 기형도의 ‘빈집’이 떠올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이런 내용의 시가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 불현듯 뇌리를 스치다, 이 얼마나 진부한 표현인가.)

시의 내용과 영화의 내용이 맞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빈집에 여자가 마치 범인을 잡는 형사처럼 들이닥쳤을 때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마도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는 시의 마지막 구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들이닥쳤을 때 망연자실 하는 모습으로 끝나도 좋았을 것이다. 왠지 해피한 결말은 좋지 않은 영화 같은 선입견이 가시지 않는다.)

왜 하필 죽은 자를 기리는 비석이 있는 곳에 남자가 앉아 있고 그 곳으로 여자가 찾아 왔는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 둘은 다시 만났고 만났을 때 화난 표정이 아니고 반갑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만난 이후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없다. 영화가 끝났는데 영화 밖의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그러함에도 유추해보면 여자는 여전히 치약의 끝이 아닌 가운데를 눌러 짤 것이고 세면대에 긴 머리칼을 떨어뜨릴 것이고 남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긴 시간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또 싸우고 싸울 것이며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대화로 주먹질이 오갈 것이다. 그러다가 영영 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둘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흰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알콩달콩 살면서 여전히 그 일을 결혼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여기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런게 천생연분이라며. 마지막까지 내가 가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하는 장면은 감독의 수완이다. 둘이 합친 다음 운전 연습을 하면서 바보라는 말로 언성을 높이는 남자에게 여자가 져주는 스타일로 가면서 싸움은 더 진전되지 않는 것은 아쉬움이다. ( 왜, 여자가 이해해야 하지 하는 의문과 함께)

문성근이 성우로 나온 나레이션의 마지막도 기억해야 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신기루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좋은 배우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이야기>는 전개가 매우 빠르다. 둘이 하는 대화도 허접하지가 않다. 뭐, 심오한 철학적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도 시의적절하게 사용했으며 그로 인해 천박하지 않고 로맨틱하게 끌고 갔고 마무리 지었다.

이 영화 이후로 이 같은 방법을 추종하는 아류작들이 그 수준을 따라가기보다는 모방에 머물면서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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