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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메밀꽃 필 무렵>(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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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19.03.30  08: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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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에 대한 추억은 강렬하다. 오지 말라고 밀쳐 내는 것을 기어이 따라가겠다고 발버둥 쳤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살림은 넉넉지 못했고 호떡은 너무 먹고 싶었다. 실랑이하다가 언덕을 하나 넘으면 저 멀리 커다란 미루나무가 반색한다. 을러대는 종주먹과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의 대결이다.

돌아보면 물러서는 척하다가 아니보면 한 발씩 전진할까. 번민하는 중에도 발은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는 없다.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나무 아래 서 있다. 그러면 승자는 나다. 집에서 너무 많이 떨어졌다. 그냥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모정이다.

어쩔 수 없이 누그러진 엄마가 손을 내민다. 잡은 손에 신바람이 났다.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장으로 가는 길의 겨우 10분의 1지점인데도 다 온 듯이 날아갈 기분이다.

여기서부터 십리 길이다. 꼬부랑 고개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마침내 신작로에 이르면 밀가루 냄새가 엿기름과 설탕과 버무려진다.

좁은 골목길 장꾼들 사이를 누비다가 장승처럼 그 가게 앞에 우뚝 멈춰 선다. 이 순간 세상은 내 편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봉평 장이니 오일장이니 장도막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부터 설렜다. 허 생원은 어떤 심정으로 오일장에 나섰을까.

무엇을 사 먹기보다는 무엇을 팔기 위해서였다. 팔면서 한눈을 파는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평생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추억 하나가 있었다. 비록 봉평 인근의 대화, 제천 등을 떠도는 장돌뱅이 신세지만 그날의 일만 생각하면 없던 힘도 절로 생겨났다.

특히 오늘처럼 달이 휘영청 밝아오면 그는 그날의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하필 그날은 메밀꽃도 지천이다. 애당초 글러 먹은 여름 장을 마치고 객줏집 토방에서 잠이라도 잘라치면 더위가 극성이다.

자다 깨서 목욕이나 하려고 개울가로 나왔다. 돌밭에서 옷을 벗어도 되련만 달이 너무 밝아 물방앗간으로 들어간 허 생원. 아뿔싸.

그곳에는 그보다 먼저 들어온 임자가 있었으니 일색이 그 근방에서 제일가는 성 서방네 딸이 아니더냐. 나를 기다린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놈팽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울고 있다. 딸이라고 해서 집안이 기우는데 걱정이 없을 수 없다. 또 울 때처럼 처녀에게 정이 끌릴 때도 없다. 절묘한 타이밍에 생원은 처녀를 다독인다. 그리고 이럭저럭 서로 눈이 맞았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남자가 죽기 직전의 여자와 급하게 사랑을 나누듯이 숭고하면서도 던져 버리는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두 사람은 그렇게 무섭고 기막힌 밤을 지샜다.

장돌뱅이 주제에 천하일색 처녀와 그랬으니 이것은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대업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는 그 추억 하나로 이십 년을 버텨왔다. 오늘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를 걸어야 한다. 봉평 장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으니 그곳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다고 떠난 밤길이었다.

달빛은 흐뭇하고 산허리는 온통 소금을 뿌린 듯 피기 시작한 메밀꽃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오늘도 그는 그 이야기를 할 참이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이 맞는다는 핑계도 댄다. 마침 동이도 함께 있다. 술집에서 자신이 점찍었던 작부에게 수작을 거는 동이에게 어린 녀석이라고 혼쭐을 냈으니 미안한 감정도 있다.

친구 조 선달은 그 이야기라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하지만 동이는 처음이다. 생원은 첫날 밤이 마지막 밤이었던 그날의 로맨스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처럼 늙어가는 그 처녀를 만나면 같이 살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그가 고향 청주 대신 봉평 장을 떠나지 못하고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을 걷고 저 달을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이도 자신의 집안 내력을 털어놓는다. 어머니는 제천에서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들을 달도 차지 않은 채 낳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 후 의부를 얻어 술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의부는 망나니라서 때리고 칼부림까지 한다. 열여덟 살에 이 짓을 하고 있는 동이의 신세가 처량하다.

동이는 좀 형편이 펴지면 제천에 있는 엄마를 봉평으로 모셔오려고 한다. 부지런히 일하면 안 될 것도 없다. 어미도 한 번은 아비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동이는 덧붙인다.

허 생원은 생각한다. 성처녀와 하룻밤 인연으로 애가 태어났다면 지금 동이 나이쯤 됐을 터이다. 그는 동이에 업혀 강을 건널 때 녀석의 등이 유난히 따뜻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귀의 고삐를 잡는 손이 자신처럼 왼손잡이인 것을 본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호떡을 사 먹고 입에 묻은 설탕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면 이제는 진한 갈색의 순댓국이 유혹한다. 가능할까. 생일도 아닌데.

잘잘 흐르는 돼지기름을 입에 묻히는 날이 일 년에 두서너 번 있었다. 그리고 어인 일인지 옷이라도 한 벌 사 입게 되면 장날은 그 누구의 날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 있는 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이었다.

어찌 그날을 잊으랴. 이일과 칠일. 나의 코흘리개 시절 오일장은 이런 것이었다. 허 생원의 오일장은 나와는 달랐다. 그가 노리는 것은 아직 후리지 못한 충줏댁만이 아니었다.

계집과는 영 연분이 먼 그가 하룻밤의 그 처녀를 만날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가 봉평 장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평생의 사랑 그녀를 생원은 만났을까. 그리고 동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았을까.

이효석은 한국의 대표 단편 작가다. 특히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며 한국 대표 단편이라고 불릴만하다. 그는 이외에도 많은 단편을 썼다.

작품들은 토속적 에로티시즘이 물씬 풍긴다. 인간의 본능을 짐승에 빗댄 소설이 많다. 나귀가 바를 끊고 아우성친 것은 아이들 장난 때문이 아니라 암컷 때문이었다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의 또 다른 걸작 <분녀>는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돼지꿈으로부터 시작한다. 돼지는 남자이다. 그 숫자는 한둘이 아니다. 당시 유교적 분위기에 비춰 볼 때 매우 파격적이다.

비록 연속된 겁탈이 있기는 했지만 분녀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처음에는 명준에게 다음에는 만갑이에게 그다음은 상구에게 그리고 중국인 왕가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작가의 탐미적 관점이 어느 정도까지 확산되고 있는지 가늠케 한다.

이효석은 학창시절부터 서구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토착적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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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bgusp@news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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