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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시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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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시골집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10.26 0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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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5대 임금 철종은 불운했다. 왕까지 한 사람에게 불운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이런 표현도 무리는 아니다. 왕이란 자고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중차대한 임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종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불운했다고 보는 것이다. 불운의 다름 이름은 무능이니 무능한 임금 아래의 백성은 고달팠다.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교동도에 유배됐다가 강화도로 와서 농사일을 하는 일반 백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이틀 후 부랴부랴 왕으로 추대됐다. 조정에서 나온 관리가 데리러 오자 죽이려는 줄 알고 뒷산으로 도망갈 만큼 늘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장성했지만 학식이 부족하고 왕위 계승 수업을 받지 않아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했다. 순원왕후 역시 당시 세도가 였던 안동김씨의 세력권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조정은 안동김씨가 좌지우지 했다.

나중에 정사에 눈을 뜬 철종은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세도가들의 위세에 밀려 정사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세도가들은 강화도령이라고 철종을 비아냥 거리면서 그가 왕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시로 후사를 들였으며 이로 인해 그는 부인을 8명이나 두게 됐다.

제명에 살지 못하고 33살에 죽은 원인중의 하나였다. 그는 죽어서 호랑이처럼 가죽을 남기는 대신 조선왕이라는 칭호를 후대에 전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부터 나라는 이미 망국의 징조를 보였다. 탐관오리의 횡포는 극에 달했고 민심은 흉흉해 진주민란 등 전국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지금 강화도에는 철종이 어린 시절을 보낸 터에 기와집이 지어져 있다. 이 집에서 철종( 당시 이름 이원범)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초가집에서 지냈으나 왕까지 지낸 사람이 자란 곳이라고 해서 당시 강화유수 정기세가 지금의 집을 지었다.

말하자면 임금님의 시골집인 셈이다. 한편 임금님에게는 임금이 되기전에 사귄 첫사랑이 이 곳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왕이 된 후 그 마음을 못잊어 궁으로 데려 오려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임금님의 첫사랑은 그 후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는지 평생 수절하면서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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