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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독 짓는 늙은이(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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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독 짓는 늙은이(1969)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9.2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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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원 감독의 <독 짓는 늙은이>(1969)는 젊은 청년이 독 짓는 움막을 찾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젊은이는 하루 밤 묵게 되는데 그 때 노인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내용이 바로 자신과 직접 연관된다는 것을 안다. 비로소 그렇게 애타게 헤매던 자신의 뿌리에 얽힌 기막힌 사연은 묻히지 않고 세상에 나온다.

노인(황해)은 늙었지만 건장하다. 노동꾼의 투박함과 장인의 고집이 대단하다. 그가 이 영화의 핵심인물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대뜸 알아챈다. 독 짓는 늙은이는 뒤에 나오지 않고 바로 나와 한 많은 늙은이의 일생을 에두르지 않고 직선으로 보여준다.

하얀 눈이 한 자나 온 어느 겨울날이다. 여인이 쓰러져 있다. 구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노인이다.

노인은 동상에 걸린 여인을 정성껏 치료한다. 치료의 방법을 여기서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동상에는 막힌 혈관을 뚫듯이 피의 순환이 중요하므로 정성껏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주무르는 것이 특효라는 것이 밝혀둔다. 흰 눈으로 그 보다 흰 고쟁이를 벗기고 앞을 닦고 뒤를 문지를 때 숨이 막힌다고 표현할 만하다. )

 

살아난 여인(윤정희)은 미인이다. 미인은 잠꾸러기 이면서 생명의 은인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는 예순 넘어 홀로 사는 그 늙은이와 결혼한다. 그 사이 아들 당손도 태어난다. 둘은 깨소금을 볶고 나이 차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는 듯 연신 웃음꽃이 만발이다.

하지만 노인은 말 그대로 노인이니 늙었고 여인은 젊다. 이런 사실을 두 사람도 알고 관객들도 안다.

노인은 늙은 몸을 젊은 몸 쓰듯이 쓰고 싶다. 그래서 뜸부기를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 사다 먹는다.

독을 가지러 온 방물장수는 그런 노인에게 부인이 절색이니 무쇠인들 견디겠느냐고 눙친다. 오랜 친구( 앞서 사연을 전하는 노인이다.) 역시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인데 지는 것은 친구가 아니라 노인이다. 노인의 적수가 나타난다. 그 적수는 호적수다. 이름도 근사한 석현( 남궁원)이 떡 벌어진 모습으로 옥수 앞에 나타난다.

둘의 수작질을 보니 그 전에 아는 사이였고 단순히 그 사이를 넘어 연인 관계였다. 석현은 7년 동안 그녀를 찾았고 그녀가 눈밭에 쓰러진 것 역시 그를 찾다 그리 된 것으로 보아도 되는가, 아닌가.

어쨌든 옥수는 솔로가 아닌 외간남자의 여자로 옛 여인을 만나야 되는 신세다. 여자의 본능은 처음에는 그런 남자를 떨쳐 보려고 애쓴다. (애쓴다고 표현한 것은 그래 보았자 어쩔 수 없다는 뒷말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석현은 그러나 노련하다.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거절하는 노인 앞에 독 짓기 전에 해야 할 일, 쓸고 닦고 흙을 반죽하는 일을 멋지게 해낸다. 마침 조수가 필요했던 노인은 그를 받아들이고 옥수는 그에게 밥을 해준다.

만리타향 떨어져 있어도 그리운데 한 지붕아래서 살고 있으니 옥수는 밤이면 밤마다 베개를 끌어안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머리 밑에 있어야 할 그 것은 다른 곳에 있고 그렇게 한들 석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고 해서 나무랄 관객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밤의 호롱불과 독짓기 위해 때는 불과 그녀의 눈에서 나는 불 중 그녀의 눈 불이 가장 밝고 가장 힘이 세다.

때는 춘삼월 진달래는 붉게 물들었고 물레방아는 밤마다 하염없이 돌아간다. 밤은 길고 긴 그림자는 언젠가는 꼬리를 잡히는 것이 법이다.

옆자리가 빈 것을 알면서도 있는지 한 번 더 만져 본 뒤 뒤를 쫓던 노인은 밤하늘의 별처럼 속삭이듯 쏟아지는 남녀의 말을 듣는다.

바로 낫을 들고 년 놈의 목을 치기 전에 노인은 주저앉아 이렇게 탄식한다. 당산 어미야, 제발 돌아가지만 말아줘. 현명한 노인이다. 노인들이 형편없이 구겨지고 있는 요즘에 이런 노인은 본받을 만한가. 아닌가.

바람을 한다고 해서 다 이뤄지는 것이 아니 듯이 노인의 꿈은 봄과 함께 사라진다.

년 놈이 한 몸이 돼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낮은 물론 밤에도 할 일을 잊은 노인이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독 짓는 일 뿐이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방물장수는 화를 내고 노인은 절망에 빠진다.

그는 어린 당손을 부잣집에 양자들이라는 앵두나무집 노파의 제의를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아니 받을 수 없다. 아비가 죽었으니 이제 그만 가자라는 말을 듣고 노인은 눈물을 흘린다. 아들은 떨어질 줄 모르고 멈칫 거리는데 잔인한 앵두나무집 노파는 봐라, 벌써 시체에서 썩은 물이 나온다고 어린애 손을 잡아챈다.

긴 사설을 더 늘어놓는 것이 독자들에게 이가 될지 해가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스포일러에 애초부터 관심 없는 나였기에 결론까지 말하는 것에 대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떠났던 여인은 아들을 못 잊어 어느 날 돌아왔다. 쓰러졌던 추운 겨울인지 석현과 사랑을 나눴던 꽃피는 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와서 양자로 간 곳을 물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야무진 앵두나무집 노파는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 그래서 죽기 전에 끝내 만나지 못했느냐, 아니면 모자 상봉 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적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아래 팁에서 보충하기로 한다.

국가: 한국

감독: 이하원

출연: 황해, 윤정희, 남궁원

평점:

 

: 황순원 소설이 원작이다. 신봉승이 각색했다. 소설은 일제시대인 1944년에 완성됐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1950년에 발표됐다. 영화는 그로부터 19년 후에 나왔다.

원작에 대해 어떤 이들은 독 짓는 노인의 끈기가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읽거나 보는 사람들은 참고해도 좋을 듯싶다.

영화를 보고 나서 포스터가 있는지 찾아보니 과연 있었다. 제목 옆에 붉은 글씨로 ‘밤의 慾情’이라는 타이틀이 눈에 띈다. 그 위로 총천연색에 걸맞게 한쪽 무릎을 세운 하얀 다리에 노인이 붉은 얼굴을 대고 넋 나간 모습이 확연하다.

욕정의 결과로 아이가 태어났고 또 다른 욕정의 결과로 노인은 자신이 지른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 죽었다. 예나 지금이나 욕정은 한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가기도 하고 끈질긴 생명을 잉태시키기도 한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봐야할까. 사실 이 영화는 욕정이 받쳐 주지만 욕정보다 앞선 것은 독을 짓는 노인의 고독과 외로움과 장인정신이다. 독이 깨질 때 노인의 모든 것은 무너져 내렸다. 그것이 그렇게 될 때 그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짐작해 볼 수 있다. 무너진 것은 다시 세울 수 있다.

찾아온 아들이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 후손이 만든 머그컵을 들고 밤새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밤에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낮에는 가야금 켜는 소리, 벼락과 천둥소리는 무슨 결정적 장면이 나올 때마다 세게 혹은 약하게 흘러 나와 심금을 울린다.

한편 1990년 개봉된 <사랑과 영혼>에서도 물레를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데미무어를 앞에 두고 돌리는 진흙 장면은 일품으로 오래 기억에 남는다.

레이찰스 브라더스의 ‘언 체인지드 멜로디’가 배경음악인데 이 역시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하원 감독의 <독 짓는 늙은이>에도 이런 장면이 있다.

아들을 앞에 두고 노인이 '나도 9살 때부터 물레질을 했으니 너도 배우라'고 하면서 이긴 흙을 손가락으로 만지는 장면이다. 사람과 시대만 바뀌었을 뿐 돌리는 장면은 똑같다. 무려 20년 전에 한국영화는 이런 모습을 연출해 냈고 아마도 제리 주커 감독은 이 장면을 본 뜬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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