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10-08 14:08 (화)
66.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1962)
상태바
66.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1962)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9.21 1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미없는 군대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는 것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아주 비슷한 장면이 그 시절 군 막사에서 자주 연출됐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책과 겹치는 한두 개를 소개하면 이렇다.

80년대 중반 중부 전선의 최전방 대학생교육대는 넓은 연병장을 자랑하고 있었다. 막사에서 식당까지의 거리가 대략 300미터 정도 떨어졌다. 식사 시간은 비슷하고 배급받을 인원은 많기 때문에 먼저 식당에 도착하면 그 이후의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짬밥을 버리고 식기를 닦고나서 담배를 피고 양치를 하거나 저녁이라면 점호를 대비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일정이 끝나면 부리나케 식당으로 향하는데 다른 막사의 병사들이 이동하는 기미를 보이면 이쪽에서는 더 빨리 움직인다.

서로 경쟁이 붙어 연병장을 가로 질러 달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 그러다가 질서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판을 머리에 이고 뺑뺑이를 돌기도 했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104반도 저녁 식사를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 그 때 그 시절이 그립지는 않지만 기억에 또렷하다.)

대대위병소 근무를 하면서 겪었던 추위의 경험은 슈호프가 작업장 밖에서 겪었던 추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 날 만큼은 언제라도 떠벌일 수 있다. 새벽 2시부터 3시까지 고참과 위병 근무를 나선 것은 이등병 말 호봉 쯤 되는 어느 보름달이 환한 정월 무렵이었다.

현장에 도착하자 고참은 바로 연탄난로가 켜진 위병소내로 들어갔다. 홀로 근무를 서는데 휘영청 밝은 달이 어깨에 맨 M16 총 그림자를 뒤로 길게 드리웠다. 상념에 빠지기 좋은 조건이었지만 이내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영하 30도면 철수하는 야간 매복조가 통과한 후 위병소는 적막에 쌓였다.

바람이 불어 왔고 잠시도 서 있을 수 없어 마구 제자리 뛰기를 하는데 고참은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교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단 1분 만이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더는 서 있기 힘든 상황이 왔을 때 이러다가 동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잠깐 쓰러질 듯 휘청거리기도 했다. 죽음 직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 교대 근무조가 왔다.

언 발을 절뚝이며 위병소로 들어가 고참을 깨웠다. 그 고참은 눈을 부라렸고 아무런 미안함이 없었다. ( 그는 더 고참이 됐을 때 소대로 나온 달걀 두 판을 혼자 다 먹었다고 나보다 2개월 빠른 선임이 전했고 그 말을 한 이후 그는 '그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라고 덧붙였다는 말을 기억한다. 희미하게 그 고참의 얼굴과 이름이 떠오른다. 그러니 슈호프가 동사하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곡괭이질을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이밖에도 담배 한 개비에 울고 울었던 나날들, 하루 일과보다 더 살벌했던 점호 모습 등 군 생활과 흡사한 수용소 모습은 잊혀 져 가는 오래 전의 상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살려 놓고 있다.

자, 이제 개인적 넋두리를 멈추고 슈호프가 겪은 수용소의 하루를 따라가 보자. 당시 소련 시베리아 형무소의 사정은 나빴다. 죄수들은 언제나 배를 곯았고 슈호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가 한 조각의 빵을 먹거나 멀건 국물을 식사로 대할 때 그 간절함과 경건함은 신앙심 깊은 수도사를 연상시킨다. ( 앞으로 무엇을 먹을 때 특히 따끈하고 부드러운 빵이 앞에 있을 때는 슈호프의 그 간절함을 생각하면서 고맙게 먹어야겠다.)

그러니 살은 없고 뼈만 남은 생선을 뼈째 꼭꼭 씹어 먹고 먹은 것은 뱉지 않고 꿀꺽 삼킬 수 밖에 없다. 굳은 빵 껍질로는 남은 음식을 싹싹 긁어 먹고 나중에 그 것이 부드러워 졌을 때 맛을 음미하면서 먹어 대는 과정은 먹는 것이 인간의 품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난다. (그래서 나도 빵을 먹을 때 빵 껍질로 남은 우유 찌꺼기를 슈호프처럼 긁어 먹어 보았더니 의외로 잘 긁어 졌고 말끔하게 먹을 수 있었다.)

제목에서 책의 내용이 다 왔지만 이 쯤 설명이 더해 졌으니 솔제니친이 의도했던 바는 어느 정도 충족 됐을 것이다.

슈호프가 수감됐던 시기는 2차 세계 대전이 관통하던 때 였고 스탈린의 광기가 무척 강했던 시절이었다. 천만 명 이상을 숙청한 것으로 전해진 지독한 독재자 스탈린은 별 죄목도 없는 선량한 시민을 마구 가둬 들여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그는 턱 주위에 털이 많았다. 그래서 솔제니친은 이름을 쓸 수 없어 털보 영감이라고 표현했다. 그 털보 영감은 친형제도 믿지 못했다.)

우리의 가엾은 슈호프도 그에게 희생당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조국을 위한 싸움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도망친 것이 간첩죄에 해당한다고 해서 무려 10년 형을 언도 받고 8년째 수형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세월이면 어지간히 이력이 났을 법도 하지만 수용소의 하루는 나아지지 않고 어제와 같은 오늘의 배고픔과 추위와 고된 노동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새벽에 기상해서 저녁에 잠을 잘 때까지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간수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같은 죄수이면서 저 혼자 편하기 위해 다른 죄수를 구석으로 모는 악질 죄수를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탈영병을 사살하는 붉은 병사를 욕할 수도 없다. 뇌물의 먹이사슬도 그렇다. 다 살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 무려 3653일이다. (3일이 는 것은 그 사이 윤년이 끼었기 때문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붙어있다.) 슈호프는 그러나 죽지 않고 오늘도 살아 있다. 살아남아서 형기를 채웠고 그 형기만큼 더 살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마지막에 그런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한 번도 사식을 넣지 않은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갔는지에 대한 어떤 추측성 단어로 끼어 넣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로 선량한 슈호프가 그 곳으로 직행했을 거라는 것은 말하고 싶다.)

쓸데없는 사족이지만 104반 전원도 슈호프처럼 살아서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기를 바란다. 그래서 비참했던 영혼이 단 하루 만이도 상처 받은 그 것이 위로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슬기로운 감방생활>을 챙겨 보지는 않았지만 볼 때마다 이것은 '웰 메이드'라는 생각을 했다. 그 곳에 있는 수용자들이 보여주는 각각의 개성을 잘 포착했다. 

코너에 몰린 자들의 인간 본성이 적나라했으며 간수와 교도소 간의 이해관계가 실감났다. 슈호프가 갇힌 수용소의 생활은 한국의 감방생활이 아무리 바보스럽게 진행된다 해도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갇혀서 나갈 수 없는 자들이 보여주는 이야기와 생활은 병풍처럼 길게 뻗쳐 있다.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군대에 가기 전에는 평범한 농부였다. 

독소 전쟁에 참여했고 포로로 잡혔으나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는데 조국 소련은 그에게 훈장대신 반역죄의 올가미를 씌웠다. 다른 죄수역시 죄아닌 죄인으로 몰려 잡혀왔다. ( 작가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참고 했다고 하니 리얼리티가 있다.)

104반의 작업반장인 추린은 아버지가 부농이었다는 이유로 군대에 있다가 끌려왔다. 

전직 영화감독 체자리는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 그는 돈이 많아 사식을 매일 들인다. 그러나 노랑이가 아니라 슈호프에게 선심도 쓴다. 그는 소련 최고의 영화로 추앙받는 <전함 포템킨>의 내용도 중얼 거린다. 계단을 굴러가는 유모차와 살코기에 구더기가 넘쳐나는 장면 등)전직 해군 중령으로 바다를 호령했던 보이노프스키는 영국군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알료쉬카는 침례교도였기 때문에 25년 형을 받았다. 다 스탈린 치하에서 벌어진 일이다. ( 그래서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으니 이 점은 평가해야 하나?)

어쨌든 수용소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사람 냄새가 아니 날 수 없다. 유머도 있고 따뜻한 인간애도 있으며 악질 중의 악질도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짐승성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다. 

책은 주인공이 거의 행복하다고 할 정도로 하루해를 마치는 것으로 끝난다. 영창도 가지 않고 죽도 이인 분을 먹고 내일 먹을 빵도 있고 사식도 얻어먹고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로 마무리된다. 

독자들의 심금을 올려놓고 안도의 희망의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됐으나 소련 정부의 방해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974년 스위스로 망명했으며 1994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2008년 사망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