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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분노의 포도>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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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분노의 포도> (1939)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9.1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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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고향을 떠날 때는 대개 이 곳 보다 더 좋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기분 좋게 떠난다.

조드 가족은 그 와는 다르다. 자발적이지도 기분이 좋지도 않다. 어쩔 수 없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대대로 지어온 소작농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트랙터는 그들이 손 수 지어 만든 집을 간단히 부쉈다.

총을 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트랙터 운전수는 나를 쏘면 또 누군가가 온다고 쏴봐야 살인자만 될 뿐이라고 한다. 누가 이 짓을 시켰느냐고 물으면 지주의 관리인이라고 하고 그러면 지주를 쏘겠다고 하면 지주는 은행의 심부름꾼이라고 한다.

누구하고 싸워야 할 지 소작농들은 알지 못하고 싸울 상대가 없으니 체념만 늘어난다.

조드 가족은 캘리포니아를 이주 대상지로 찍는다. 기왕 떠날 거라면 살기 좋은 곳으로 가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날씨도 따뜻하니 얼어 죽을 리도 없고 길가에 포도가 주렁주렁 널려 있으니 굶어 죽을 리도 없고 경치도 끝내 준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전단지에는 품삯도 많이 쳐준다고 하니 지상천국, 꿈의 도시가 따로 없다.

노래도 있다. 60년대 중반인가. 사인조 혼성 그룹 마마스 앤 파파스는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불렀다. 박자도 빠르고 발음도 어렵지 않아 흥얼거리기에도 좋다. 이글스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호텔 캘리포니아'를 불렀다. 기타 반주음이 죽여주는 이 노래는 지금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왕조위 감독은 영화 <중경삼림>에서 이 노래를 틀었다. (의약뉴스 ‘내 생애 최고의 영화’를 참조해도 좋다.)

양조위의 파트너 왕페이가 노래를 들으면서 흔들어 대는 몸의 곡선이 선명하다. 선글라스를 코에 걸고 침대에 뛰어 들거나 서빙을 하거나 선풍기 앞에서 느긋하거나 봉지속의 금붕어를 쏟을 때 노래는 절정으로 향한다.

174센티미터의 큰 키에 짧은 커트 머리, 노란색 민소매를 입고 건들건들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 노래와 영화가 잘 맞는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The Grapes Wrath)가 상큼한 황금색 오렌지처럼 달콤한 스토리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모든 것이 정반대다.

제목에서부터 왜 분노가 뛰어 나왔겠는가. (노래나 영화는 이 책의 내용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밝혀 둔다.)

앞서 조드 일가라고 했으니 떠나는 것은 한 명이 아니고 가족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등 무려 10명이 훌쩍 넘는다. 개도 있다.

그 중에서 주인공 톰 조드는 눈여겨봐야 한다. 첫 머리에 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을 하고 복역 중 가석방으로 막 집에 온 상태다. 

그가 왔을 때 가족들은 이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더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톰이 왔을 때 집도 없고 가족도 사라져버렸다면 어머니는 슬퍼서 매일매일 눈물로 지새울 것인데 다행히도 톰이 왔다.

그런데 올 때 톰은 길에서 만난 케이시를 데려왔다. 군식구인 케이시는 한 때 목사였으니 설교를 했으며 가족에게 세례를 주기도 해 다들 아는 사이였다. 케이시를 포함한 조드 일가는 전 재산을 처분해서 산 낡은 트럭을 몰고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이때 여명은 조드 일가의 무사안녕을 기원 하듯이 동쪽에서 강철 같은 빛을 뿌리며 밝아 오고 있다.

그들의 등 뒤로 거대가 공포가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채. 거기가 어떤 곳인지 조드 일가는 보기 전에는 깨닫지 못한 채 긴 여정을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무려 2600마일을 가야한다. 여간 먼 거리가 아니다.

갈 길이 그러니 가는 과정에서 겪는 그들의 이야기는 신파극이 아닌데도 눈물, 콧물 없이는 들을 수도 볼 수 도 없다. 가슴 한쪽에는 분노를, 다른 쪽에서 애간장을 달고서 조드 일가가 겪는 풍찬노숙의 이야기는 하루를 꼬박 들어도 다 하지 못할 만큼 길고 절절하다.

인간의 조건은 의식주라고 했다. 입고 먹고 자는 곳이 형편없으니 가족의 건강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꿀꿀이죽도 굶기가 다반사고 옷은 갈아입은 지 얼마 인지 몰라 찢어지고 더럽고 잠은 트럭이나 노숙이나 임시천막에서 지샌다.

이렇게 굶주렸던 적이, 이렇게 더러웠던 적이 없었다. 고향에서 죽겠다는 할아버지를 약 먹여서 데려온 것은 실수였다. 이미 고향을 떠나 올 때 정신적으로 죽은 목숨은 이동 중에 쉽게 목숨을 내놓았다.

그 할아버지를 그리다 정신착란을 보인 할머니도 그렇게 됐고 아들 하나는 강을 따라 도망을 갔고 젊은 사위는 임신한 아내를 두고 조용히 사라졌다. 애초 하나였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절망했고 톰은 분노했으며 목사는 비참한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했다.

절망은 삭이는 것이니 길고 분노는 타오르는 것이지 폭발해야 한다. 저항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모아 대지주의 횡포에 맞섰던 목사는 그들의 패거리에 맞아 죽었고 그 죽음을 목격한 톰은 용광로 같은 분노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살인을 하나 더 추가했다.

캘리포니아는 꿈의 고향이 아니라 인간 살육이 저질러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곳으로 전락했다. 하루 벌어먹기 위해 온 가족이 나서도 일자리가 없다.

복숭아 따는데 100명이 필요한 곳에 5000명이 모여든다. 목화 따는 곳도 그렇다. 약삭빠른 농장주는 그들의 이윤을 위해 일당을 1달러에서 50센트로 깎고 다시 20센트를 부르는데 그나마도 늦으면 다른 사람 차지다.

세상은 품삯이 좋다는 전단지로 넘쳐나고 그것을 보고 미국의 모든 주에서 캘리포니아로 몰려든다.

66번 도로는 온 나라가 움직이는 것처럼 트럭으로 우글대고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쓴 맛을 보고 난 뒤에 치를 떨며 돌아선다.

길가에서 조드 일행은 그들에게서 캘리포니아는 가진 것이 없는 일자리를 구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지옥이라는 말을 듣지만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고 돌아갈 고향도 집도 없으니 가서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다.

그들의 말은 맞았다. 조드 가족처럼 하루아침에 쫓겨나서 살기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저마다 굶어서 붉은 눈을 한 채 일거리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여기 저기 쏘아 다니고 있었다.

경찰들은 이들을 범죄자로 취급하며 부자의 재산을 지키는 머슴 역할을 한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풀칠하기도 어렵다. 이것이 대공황기의 미국의 모습이다. 정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도 먹고 사는 것이 절박하니 기적 같은 것을 바라기도 어렵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는 조드 일가의 행복한 결말을 존 스타인벡은 끝내 추가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하얀 집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이뤄주지 않았다. 그는 현실이 아닌 거짓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아닌 우리가 됐을 때 어떤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임신한 딸은 죽은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죽어가는 노인에게 아기가 먹어야 할 젖을 먹인다.

마치 그녀는 하느님 같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있은 적이 없고 책속에서는 언제나 존재하는 신이 조드 가족에게 내려왔다. 산고를 치르고도 우유한 잔 먹지 못한 산모는 신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해내고 말았다.

: 인간이 어디까지 비참해 질 수 있는지, 어떤 때 분노하고 무너지는 지, 단란했던 가정이 깨져 나갈 때 어머니는 도대체 떠나는 자식들을 어떻게 붙들어 맬 수 있는지 그리고 출산을 앞두고 영양실조에 허덕일 때 산모는 태어날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품을 수 있는지 존 스타인벡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거듭된 흉년으로 소작농에게서 더 기대할 것이 없던 은행과 지주들은 트랙터로 그들을 몰아내고 고향을 잃은 조드 가족은 먹고 살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나는데 그 비참함은 필설도 다 표현하기 어렵다.

하루 이틀을 굶으면서도 인간이기를 포기 하지 않는 용기는 내적 단련이 아무리 강한 자라 하더라도 견디기 힘든 과정이다.

하물며 평생 농사만 지어온 이들이기에 그들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컸고 눈앞의 현실은 온 통 암흑뿐인데 그래도 살아 나간다.

가족은 끝까지 가족애를 지키고 이웃을 생각하고 잘못을 비판하고 그 것을 행동에 옮기고 자신보다 더 절박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나눠주는 행동을 한다. 성자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왔을 때나 가능한 일을 조드 가족은 해내고 있다.

오클라호마에서 왔기에 '오키'라는 이름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때로는 빨갱이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 1달러를 벌기 위해 온 가족이 목화 농장에서 기를 쓰는 모습은 영화( 존 포드 감독이 1940년에 만들었다. 톰 조드 역에 헨리폰다가 열연했다. 흑백이다.)로도 보았으나 책이 더 실감이 났다.

도대체 누구 잘못인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굶주려 죽는 이들, 먹기 위해서라면 벌레처럼 기면서 노예가 되고자 하는데도 그것마저도 거부되는 현실은 우리도 겪은바 있다.

말을 하면 주동자로 찍히고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지주와 유착된 경찰들은 그들을 잡고 총을 쏜다.

주정부와 보건부와 경찰이 모두 한 통속이 돼서 이주자들을 구석으로 몬다. 그들은 항의하다 죽고 죽으면 부랑자 한 명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다. 조드 일가는 사람이 아닌 어쩌면 그들도 사람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다. 홍수가 빠지고 나서도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산모가 우유를 죽어가는 노인에게 물리는 끝장면은 조금 실망스러울 수 있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평자들은 이 점을 집요하게 비판한다. 책의 구성이 산만하고 짜임새가 떨어진다는 것. 참고하면서 읽어 보면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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