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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페스트>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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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페스트> (1947)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5.2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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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가 죽어야 할 곳은 시궁창이거나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곳이라면 움직이지 않고 썩어가는 쥐를 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계단에서 몸을 떨다가 죽는 쥐를 본다면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처음에는 무심할 수 있을 것이나 되풀이 되면 더욱 그렇다. 의사 리외도 마찬가지다.

그가 진료실 계단을 나올 때 층계참에서 죽은 쥐의 시체를 밟았다면 기분 나쁘기에 앞서 이상한 기분이 들 것이다. 쥐가 나올 곳이 아니고 죽어야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에도 그러더니 저녁에도 그렇다면 심상치 않다고 봐야 한다. 대규모로 쥐 소탕령이 내려진 것도 아니고 끈적이에 쥐약을 붙여 놓지도 않았는데 복도에서 큰 쥐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더니 비틀거리며 죽는다.

 

균형을 잡는 듯하다가 반쯤열린 입에서 작은 꽃 같은 피한 방울을 묻히고 죽은 쥐는 털이 젖어 있다. <이방인>의 작가 카뮈의 <페스트>는 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프랑스의 도청소재지에 불과한 알제리의 해변가에 있는 오랑의 도시에서 일은 벌어지고 있다. 이 도시에서 쥐가 처음으로 죽을 즈음 의사 리외의 서른 살 난 아내는 침실에 누워 있는데 해수병에 걸려 병색이 완연하다.

그날 오후 리외는 요양 차 아내를 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보낸다. 병원의 수위는 왕진 갔다 온 리외에게 죽은 쥐의 꼬리를 잡고 어떤 나쁜 놈들이 죽은 쥐 세 마리를 갔다 놨다고 불평을 해댔다.

마지막 경련을 하고 죽은 쥐들의 시체는 병원의 계단뿐만 아니라 도시 쓰레기통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사방에서 산처럼 쌓여갔다.

공장과 창고에서는 한꺼번에 수 백 마리의 쥐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석간신문들은 당국이 행동할 용의가 있는지, 구역질나는 쥐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긴급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 즈음 쥐꼬리를 들고 있었던 수위는 목의 림프절과 사지가 부어오르고 체온이 40도에 달했다. 입은 검게 타들어 갔고 끊임없이 헛소리를 하다가 먹은 것을 토해냈다.

의사는 뒤늦게 격리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환자는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남겨 두고 사망했다. 수위의 사망은 다른 사람의 사망에 앞서 일어난 것에 불과했다.

수위가 죽은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더 어려운 시기가 오랑의 도시를 덮쳐오고 있다. 오랑의 시민들은 쥐들이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와 떼로 죽고 수위가 이상한 병에 걸려 목숨을 잃는 일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차츰 공포로 변해갔다. 리외외에도 수사 검사 오통, 시청의 비정규직 그랑, 큰 호텔에 머물고 있는 장 타루, 신문기자 등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점차 악화 일로를 걷는다.

의사들은 이 병의 실체를 깨기 위해 서로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러는 사이 환자들은 이 곳 저 곳에서 급속히 퍼져갔다. 리외는 왕진을 가거나 병실에서 환자를 치료하지만 역부족이다. 부어오른 림프절의 종기를 십자모양으로 째야 하는 비슷한 증상의 환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대부분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죽어갔고 죽어나간 환자 수는 날마다 증가해 그 수를 세는 것조차 무의미해졌다.

리외는 전염병이 틀림없다며 이는 온대지방에서 벌써 여러해 전에 없어진 페스트라고 결론을 내렸다. 페스트라는 단어는 곧 재앙을 의미했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에게도 곧 닥쳐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의사 리외는 초조해 졌다. 마비와 탈진, 눈의 충혈, 구강오염, 두통, 사타구니의 멍울, 극심한 갈증, 정신착란, 전신에 돋는 검은 반점( 그래서 페스트를 흑사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몸 안에서 느끼는 찢어지는 고통, 그리고 마침내는 맥박이 실낱같이 약해지고 무의미한 몸짓을 하다가 사망한다는 사실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과거 페스트 때문에 고통 받았던 인류를 생각했다.

새들이 남김없이 사라졌던 아테네,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칠십년 전의 중국의 광둥,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로 구덩이를 메우던 마르세유의 도형수들, 그것을 막기 위해 거대한 성벽을 세운 프로방스, 콘스탄티노플 병원의 맨땅에 가져다 놓은 축축하게 젖은 침대들, 환자를 갈고리에 찍어 끌어내는 모습, 마스크 쓴 의사들의 카니발, 산사람들이 밀라노의 공동묘지에서 벌이던 성교, 공포에 질린 런던의 시체 운반 수레들, 도처에서 질러대는 비명들로 가득했던 밤과 낮, 시체 놓을 곳을 찾기 위해 횃불을 들고 서로 싸우던 아테네 시민들을 리외는 기억했다.

그는 예방책을 세우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다. 재앙을 멈출 수 있는 적절한 대책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사망자는 계속 늘고 있다.

병의 확산추세로 볼 때 지금 당장 멈추지 않으면 시민의 절반이상이 사망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절정기도 오지 않았다. 쇠퇴기에 접어들어 페스트의 소멸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다.

그 시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세균에 감염됐고 그래서 비장이 사흘 만에 네 배로 커지고 장간 막의 멍울이 오렌지만큼 부풀어 올라 손 쓸 새도 없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나갔다.

냉정을 잃지 말라는 포고문, 시의 차단선 설치, 의사들의 혈청도 무용지물이었다. 잠시 헤어져 있을 것으로 여겼던 가족들은 영원한 이별 앞에서 몸서리쳤다.

환자들은 격리돼 수용됐고 체포하듯이 끌려갔다. 짜증과 화와 울분과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으나 그런 감정으로는 폐스트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필품의 보급제한이 왔고 산 사람들은 병에 걸려 죽기 전에 굶어 죽는 것은 아닌가 새로운 걱정이 앞섰다.

관은 부족해 시체를 비워내면 재사용됐다. 나중에는 매장할 땅이 부족하고 화장터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트려야 할 형편에 처했다.

절도와 약탈과 탈출을 위한 무장대의 총격이 벌어졌다. 모두가 페스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밀수꾼 코타르 만큼은 즐겁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만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지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고스란히 만족감을 내보이고 있다. 죽음의 도시에서도 행복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가하면 시청직원 오랑은 그를 데려온 국장이 약속을 어기고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아 힘든 가정 형편에도 낮에는 직업에 충실하고 저녁에는 보건대에서 활약한다.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에 회개라면 자신 있는 예수회 소속의 파늘루 신부처럼 열정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아직 신이 존재하지 않아 신부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지옥 같은 오랑을 탈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시도한다. 오랑시 외곽에 아내가 있고 자신은 이 도시의 원주민도 아니고 잠시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으며 남아 있을 미련이 없다.

하지만 도시를 폐쇄한 도청은 긔의 탈출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고립된 가운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의사 리외를 돕기로 한다.

이미 결성된 보건대 활동에 적극 나서기로 한 것이다. 떠난다면 부끄럽다고 랑베르는 리외에게 남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서 죽음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보건대 활동에 나섰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리외와 오통, 오랑, 그리고 타루 등의 헌신적 활동에 자극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시민의 절반이 죽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거부 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죽음 앞에서 인간만이 갖는 숭고함의 다른 표현인가.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 앞에서 굴복하는 가치관의 상실은 집단징벌로 나타났고 연대의식으로 싹텄다.

어느 날 방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양이 늘어났다. 페스트가 물러나고 있다는 징조였다. 때가 온 것이다. 이는 예언이 아니라 사실이며 현실이었다.

: 군것질 거리가 없던 어린 시절, 다른 것은 다 먹었어도 쥐만은 먹지 않았다. 쥐는 먹는 것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언제나 끈적이의 종이위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동물이라면 다 좋아했던 할머니도 쥐만큼은 싫어했으며 죽여 없애는데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쥐는 언제나 박멸해야 할 존재 였으며 어쩌다 꿈에라도 보이면 그 날은 재수가 하나도 없는 날이라고 여겼다.

유년시절의 이런 기억은 커서도 되풀이 됐다. 보이면 죽이려 들거나 아예 외면했다. 상상 속에서도 쥐는 나타나서는 안됐다. 그런데 그 쥐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씩 죽어 나가는 쥐를, 며칠 동안 기억하면서 지내는 시간은 고역 그 자체였다.

쥐의 출현은 부조리한 현실의 극한이었다. 오랑의 도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었고 죽어 나가는 사람은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으니 그들이 느꼈던 공포는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직무를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들은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신부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감옥인데도 반항심대신 헌신적인 희생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숭고한 인간애는 이런 것인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의 사투는 막다른 길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최후적이어서 보는 내내 나라면 그들처럼 행동할 수 있을 까하는 거듭한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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