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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시간을 최대한 억제하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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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시간을 최대한 억제하고 기다렸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5.0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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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상병이었을 때 호이얀 정글은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었다. 마치 함양의 지리산자락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사방이 어두워져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았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산 속에서 그는 방향감각을 제대로 잡았고 언제나 왔던 곳으로 돌아오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는 작전 중에는 언제나 첨병을 섰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제일 먼저 앞장섰다. 부대원들은 그런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소대장은 막 상병으로 진급한 그를 다음 달에 병장으로 일 계급 특진을 상신해 놓은 상태였다.

소대장의 머릿속에는 중사까지 가는데 세달 정도를 잡고 있었다. 매달 진급을 하면 안 될 것도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는 위험에 처한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 줄 것이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소대장은 그가 필요했다.

총무과장은 대접받고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고향에 있었다면 여전히 천덕꾸러기 였을 자신이 군복을 입고 총을 잡자 사람이 달라졌다. 그는 군대체질이었다. 자신도 그렇고 동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처럼 전투를 즐기는 사람도 없었다. 남들이 피하는 전투를 그는 기다렸다. 정글을 헤치고 나갈 때 그는 살아 있었다. 이런 날만 매일 벌어졌으면 했다. 어머니가 기도하듯이 그도 기도 했다.

매일 전투하고 매일 총 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우기인데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잠시 갠 하늘에 산천은 살아 났다. 새들은 지저귀었고 계곡물은 쉬지 않고 흘렀다.

이런 날은 작전하기에 좋았다. 총무과장은 감으로 한 건 올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사방은 고요했고 바람한 점 없었다. 모기들은 날 뛰었으나 견딜 만 했고 정 참기 힘들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오렌지 물방울을 빗물처럼 받아 몸에 발랐다.

미군기가 굉음을 내며 정글 바로 위에서 뿌리는 녹색 가루를 두 손을 가득 펴고 받아서는 얼굴에 제일 먼저 가져갔다. 가루에서 고향냄새가 났다. 맡고 또 맡고 그러다가 이마에서 부터 턱까지 세심하게 발랐다.

그리고 남은 것은 팔뚝에 문질렀다. 그러면 달라 들었던 모기는 침을 꽂기도 전에 비틀 거리며 죽어갔다. 교통호에서 그는 날이 어두워 지기를 기다렸다. 낮에 숨어 있던 적은 밤에 활동했다. 이동하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적을 잡는 것은 쉬웠다.

지루하던 낮이 가고 밤이 서서히 찾아왔다. 밝았던 것이 어두워지자 작은 움직임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매복조 였던 총무과장은 그것을 즐겼다. 적을 기다리는 것은 찾아다니는 것만큼이나 신나는 일이었다.

그는 낮에 숙지한 지형지물에 눈을 고정했다. 흔들리는 것이 나뭇잎인지 사람인지 구별하려면 잠시도 한 눈을 팔 수 없었다. 거리를 눈대중 하면서 그는 낮의 기억을 밤에 적용했다.

바람에 놀라 동료가 섣불리 총을 겨누면 쉿 소리를 내면서 제지했다. 적이 다가온다고 믿었던 움직임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이었다. 그는 병장과 한 조였으나 명령은 그가 내렸다.

병장은 상병인 총무과장의 감을 믿었고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준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소대장 마음이 병장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준한 총신을 내리 눌렀을 때도 아무런 불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밤새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았다. 내무반에서 쉴 때면 하루 종일 자고 또 잤으나 작전만 나오면 잠은 사라졌다. 새벽녘이 되어 병장이 꾸벅꾸벅 졸 때도 그는 말짱한 정신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별은 스러지고 달도 기울어 가고 있었다. 옆 참호에서 철수 준비를 하는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총무과장은 그런 부산스러움이 화가 났다. 기어가서 총구로 동료를 꾹 찌르면서 주위를 주었다.

마치 적이 바로 앞에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고 있다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가 자기 자리로 돌아와 전방을 노려보고 있을 때 나뭇가지 움직임과는 다른 무언가가 움직였다. 움직임은 한 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앞으로 다가왔다.

직감적으로 그는 ‘적이다’ 라고 확신했다. 병장을 뚝 쳐서 깨우는 대신 그는 크레모어의 스위치를 확인했다. 적은 확실했다. 지금 눌러도 이르지 않다. 하지만 그는 적을 유인하기 위해 시간을 최대한 억제했다.

더 가까이 오면 쇠구슬이 자신들의 참호로 떨어질지 모를 상황에 오자 그는 '콩 이다'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스위치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수류탄이 터졌고 연발로 고정한 방아쇠가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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