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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터진 물집에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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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터진 물집에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4.2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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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하고 짠 기운이 어두워지는 주변을 감쌌다. 근처에 인가가 있는 모양이다. 생선 말리는 냄새와 염전의 소금기가 함께 몰려왔다. 갈매기 떼가 이쪽으로 급히 다가왔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빨리 사라졌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종현 일행은 그 근처에서 하룻밤 노숙하기로 했다. 물집은 좋은 핑계였다. 

아내도 싫지 않은 기색이다. 아무도 없는 넓은 들판에 누워 남편과 함께 지는 해를 바라보니 처녀 적 감상이 같이 물들어 올랐다.방안에만 갇혀있던 신세가 좋을 리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고생의 길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알지 못할 기대감 같은 것이 불안감과 동시에 찾아왔다.

종현은 터진 물집 사이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자 딱쟁이가 지는 느낌이 바로 들어서 일어나서 발을 들어 그 곳을 살펴봤다. 긴 걸음 끝이라 고약한 냄새가 나서 아내에게 미안했다. 터진 곳에 고여있던 물은 빠져 나갔으나 아물지는 않았다. 종현은 들었던 발을 얼른 내려놓았다.

대감 체면에 더러운 발을 코앞에 들이대고 있는 것을 누구에게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곧 네 번째 발가락이 유난히 길어 엄지발가락과 비슷한 것을 확인하고는 그만 웃고 말았다.

일어서면서 아내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말 대신 물으니 종현은 그저 껄껄 웃기만 했다. 긴 왼쪽 발가락은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의 유전을 따랐다. 어릴 때 본 외할머니의 발가락도 그랬다. 

외할머니는 그 긴 발가락으로 살을 꼬집을 때 유용하게 이용했다. 특히 등에 불록 솟아 오른 3개의 비늘을 발가락 사이에 넣고 비틀어 대기를 즐겼다. 할머니와 같이 잘 때면 언제나 그랬다. 종현은 외할머니가 죽은 후 처음으로 쪽진 머리의 그녀를 잠깐 생각했다. 늙고 주름진 모습보다는 아직 젊고 예쁜 얼굴이 아른 거렸다.

땀이 식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기가 길게 골짜기 진 등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이라 해도 해가 지면서부터는 드러난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오그라든 살갗에 오돌토돌한 것이 보기에 징그러웠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던 처지에서 노숙자 신세로 하루아침에 바뀌었는데 직접 체험해 보니 못할 것도 없었지만 몸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뚫려 있고 사방벽도 없었다. 가리는 곳이 없어서 부는 바람이 차가웠다.

종현은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일어섰다. 노숙대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해안 쪽으로 조금 더 가서 하룻밤 묵을 인가를 찾아 보기로 했다. 종현은 손을 이마에 대고 인가가 있나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는 풀을 뜯던 당나귀를 억지로 끌었다. 버티던 말을 기어이 잡아 당겨서 말이 따라오자 옆에 서 있던 아내도 군말 없이 좇아왔다.

아내는 언제나 그랬다. 남편이 무엇을 하자고 하면 반대하는 대신 그렇게 했다. 그래야 편하다는 것을 알았던 아내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종현 일행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는 오지 않고 바람은 잔잔했다. 차분하고 평온한 고요가 되레 불안을 가져왔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뒤 쫒는 자들의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굳이 그렇필요가 없었다. 마포나루나 노량진이라면 모를까 여기는 위험을 벗어난 지역이다. 일단 일차 고비는 넘기자 안도의 기운이 온 몸으로 퍼졌고 그래서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편했다.

임금과 조정대신과 궁궐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들락거렸다. 자꾸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반복했으나 종현은 그것은 까마득한 옛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거리만큼이나 아주 멀리 있어서 임금이 종현아, 하고 불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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