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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두 개의 천포창이 발가락 사이에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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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두 개의 천포창이 발가락 사이에 생겨났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4.24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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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조상 때부터 살아온 곳을 떠나오는 심정은 착잡했다. 이인의 8대조 할아버지 이종현은 가련한 신세가 서글펐다.

떠나왔으나 여전히 마음의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고향을 등지는 것은 등짐을 지는 것과는 달랐다. 살기위해서 하는 짓이지만 목숨이 하나만 더 있어도 못할 짓이었다.

일가붙이에게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병이 중해 요양하러 백두산 온천을 간다고만 했다. 뒤 늦게 세간까지 정리했다는 것을 안 사촌들은 그것이 낙향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간 종현에게 야속한 말을 그들이 쏟아 부은 것은 친족 간의 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조정에 끈 떨어진 것이 못내 서운했기 때문이었다.

소문은 임금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입이 귀에 걸리게 웃어 제키면서 내 활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며 다시 벽에 걸린 활을 잡았다. 모여 있던 신하들은 사색이 되어 등을 돌리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종현이 화살에 등을 맞고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취한 조처였다. 웃던 임금이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활에 살을 재기 시작했다. 그 손은 서둘러서 떨렸다. 살은 줄에 걸리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작 빠른 신하가 살을 주워 임금에게 두 손을 들어 바쳤다. 화가 난 임금은 발로 그 신하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벌렁 나자빠진 신하가 얼른 일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임금은 웃었고 대신들은 속으로 그것을 삼켰다.

임금이 살을 재고 줄을 당기자 납칠 한 촉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이번의 살은 화살나무로 만든 장난감 비슷한 것이 아니라 대나무로 제대로 만든 것이었다. 누군가를 겨냥하기 위해 임금은 엎드린 대신들에게 '대신들은 고개를 들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살을 먼저 맞을 까봐 숙인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눈치를 보던 병조판서가 고개를 드는 대신 입을 열고 종현이는 병 치레 때문이 아니라 조정이 싫어서 도망갔다고 고자질했다.

그리고 백두산으로 간 것도 아니고 남쪽으로 떠났는데 하인도 뿌리치고 아내와 아들 하나만 달고 떠난 줄로 아뢰옵니다 라고 아부하는 말투로 지껄였다.

왕은 노발대발했다. 손 만이 아니라 몸도 떨었다. 들었던 활을 내팽개친 임금은 지금 당장 종현이 개를 잡아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대신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종현을 잡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살을 피하고 나온 것은 안도하기 위해서였다.

병판은 금부도사의 나온 배를 지팡이로 찔러 가며 화풀이를 한 다음 그 놈을 오늘 중으로 잡아들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호령의 강도에 따라 실행도 따른 다면 좋으련만 그 시각에 종현은 이미 서울 근교를 벗어나 있었다.

서해안 쪽으로 방향을 잡은 그는 딱히 갈 곳이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뒤를 쫒는 병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기에 대로가 아닌 산 속을 타거나 인가가 드문 바다 쪽으로만 방향을 잡았다.

종현의 아내는 찡얼대는 아이를 달래느나 곱절로 힘든 동행에도 불평이 없었다. 배고프지 않고 대감 마님 소리를 들으면서 세도를 부리는 것 보다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라고 늘 생각했기에 이런 고행은 여행이라고 여겼다.

산천을 두로 보며 걷는 길은 99칸 기와집 살림에 비해도 넉넉했으며 지천으로 널린 꽃들은 배고픈 것도 잊게 했다. 종현은 그런 아내가 고마웠으나 시흥 쯤 왔을 때 발에 물집이 생기자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발가락 사이에 난 물집은 두 개였다. 고개를 숙이고 만져보던 아내는 표면이 딱딱한 것이 천포창이라고 했다. 앞섶의 핀을 뽑아 들고 뾰족한 부분을 머리카락에 여러 번 문지른 아내는 종현이 아파할 새도 없이 찔러서 고여 있던 물을 빼냈다.

상처가 건조할 때까지 쉬어 가자는 아내를 종현은 나무랐다.아내는 그래야 2차 감염이 없다는 말로 설득했다. 

종현은 발을 아내의 허리에 대고는 그대로 누워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해는 구름을 비켜 있었고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그 주변으로 붉은 빛이 막 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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