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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목면의 흔적, 한 세월을 돌려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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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목면의 흔적, 한 세월을 돌려 세우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4.0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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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엎어진 땅이 속살을 드러냈다. 겨우내 가려졌던 것이 옷을 벗었다. 무지막지한 포클레인은 가차 없었다. 저절로 싹이 나 커가고 있던 손목 굵기의 뽕나무라고 해서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지나간 발자국 마다 고랑이 생겨났다. 흔적은 깊고 가지런했다. 이런 곳이라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나란히 서서 씨를 뿌릴 만하다. 그리고 뿌린 씨 위에 흙을 덮어 두둑한 두 땅 사이를 메꿀 것이다. 이런 일을 이마에 땀이 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

팔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그 곳에 오곡백과를 심어야지. 그리고 매일 아침 참새보다 먼저 일어나 얼마나 자랐는지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흙이 말라 먼지가 일 듯 하면 곧 조루로 물을 주고 바람에 가지가 구부러지면 곧게 세워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 흙 위에 찍힌 기계의 발자국을 보면서 이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씨는 자라서 꽃이 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릴 때지 꽃을 보거나 열매를 딸 때는 아니다. 남는 고랑이 생기면 완두콩을 심어야 겠다. 왜 갑자기 완두콩 생각이 났는지는 모른다. 그냥 따로 쟁기질을 할 필요가 없고 그것을 심기에 간격도 적당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바가지에서 옮겨진 콩 몇 개를 오른손에 쥐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콩을 심고 싶다. 몸을 욕되게 하지 않고 고단한 것을 즐기리라. 그런 경험이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비단길을 통해 서역을 건너온 녀석을 생각한다. 중국 어느 나라를 거쳐서 목화처럼 붓두껍 속에 숨어 있다가 이곳 안양천에서 싹을 띄운다.

험한 여행길을 마쳤으니 쉴 만도 하다. 마침 땅이 갈렸다. 콩을 심고 가을에 여물면 따리라. 딴 콩은 햇볕에 말리지 않고 콩깍지를 벗기지 않은 채 커다란 솥에 넣어 끊이겠다.

잘 익은 콩을 꺼내서 세상에 태어난 역할을 끝낸 녀석을 맛있게 먹으리라. 껍질 채 삶은 콩은 콩의 깊은 맛이 살아있다. 깍지의 영양분까지 배어들었으니 심을 때 허리 아픈 것은 벌써 잊었다.

자장면 그릇 위에 한 두 어개 올라앉은 것을 감질나게 먹는 것이 아니라 수북이 쌓아 놓고 한꺼번에 다섯 개든 여섯 개든 죽 훑어서 한 잎에 털어 넣는다.

입맛을 다시자 침이 고인다. 그 남자처럼 그러모아서 멀리 뱉고 싶다. 그 자의 얼굴을 향해 타격을 가하고 싶다. 그러나 이인은 생각을 고쳐먹고 대신 삼켰더니 뱉어 내야 할 가래였는지 꼴깍 소리를 내면서 목구멍으로 넘어 갈 때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인은 이제 뒤로 달린다. 뒤로 달릴 때는 앞으로 그렇게 할 때와는 또 다는 맛이 난다.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가는 길은 같지만 몸의 방향을 바꿔주면 보이는 것이 달리 보인다.

발뒤꿈치를 들어 발바닥의 앞쪽이 먼저 땅에 닿도록 하면서 이인은 발자국 수를 센다. 꼭 일곱 발자국 지나서 몸을 한 바퀴 돌린다. 휘청거렸지만 곧 방향을 잡고 천하의 조조도 어쩌지 못했던 형제간의 다툼을 상상한다.

그 때 조조의 큰 아들은 일곱 발자국을 셀 동안 시 한수 짓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동생을 위협했다.

한 가지에서 났어도 왕좌 앞에서는 형제간의 우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수천 년 전에도 인간들은 이랬다. 돌연 삶과 인생이 숙연해 지고 사람을 상관없이 큰 소리로 타령을 불렀던 뒤 따라오는 늙은 남자에 측은지심이 인다.

그는 제거대상이라기 보다는 교훈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이인은 조심스러워했다.

대각선으로 여객기 불빛이 반짝거린다. 사방의 날개 끝에 붉은 빛이 빛나고 아직 안전벨트를 풀어서는 안 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직후인지 객실 내부도 환하다.

비행기의 맨 아랫부분과 시선이 일치한다.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어디로 가는 지 궁금하지 않다. 어디로 가느냐보다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이 살짝 부럽다.

강물에 아파트 불빛이 줄을 지어 번진다. 저런 걸 지으면서 설계라는 것을 했을까. 성냥갑을 일렬로 포개놓은 것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닌가. 절대자에게 부탁할 것은 저것인가. 세 번째 대상을 놓고 이인은 망설였다.

이제 유턴할 지점이다. 오금교 아래까지 왔다. 겨울한철 눈썰매장을 운영했던 시설들은 철거됐다. 다리아래서 허리를 비트는 사람은 없다. 다시 몸을 세우고 달린다. 올 때는 안 보였던 것이 갈 때는 보인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다. 완전히 멈추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읽어 본다.

‘꽃씨가 심어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 이런 말도 있다.

‘뿌린 씨가 자라서 꽃이 되고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세요.’

좋은 말이다. 기억하려고 몇 번을 되뇌었다. 저 글을 쓴 사람과 문구를 생각한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하급공무원이 그 보다 직급이 높은 과장급의 허락을 받고 천을 이어서 말뚝에 박아 놓은 것이다. 돈을 주고 개인이 저런 일을 하기 어렵다. 가상하다. 이런 때는 공무원의 존재가 필요하다.

목면의 흔적이 아련한 광목에 붓글씨라. 한 세월을 돌려놓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달리는데 힘이 났다. 가난한 효자아들이 죽은 부모의 유일한 만장에 쓴 글씨처럼 그것은 마른 나무 끝에 매달려 태극기처럼 펄럭이고 있다.

돌탑도 보인다. 땅을 고를 때 나왔던 돌 들은 크기별로 나눠 보기 좋게 서로 포개놓으니 탑이 됐다. 누군가가 시켰거나 누군가가 이러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돈 드는 일이 아니면 마음대로 하라고 승낙을 받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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