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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열하일기>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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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18.03.26  11: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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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학의 우수성은 의약뉴스 고전읽기 51회 <임꺽정>에서 밝힌바 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 순 한글로 쓴 우리글이라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한문으로 쓴 우리 문학이다.

한문으로 썼으니 한글 세대를 위해 국문으로 번역이 필요했다. 번역본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리상호(보리 출판사, 2004)가 옮긴 것을 골랐다.( 처음 발간은 1901년 김택영이 했다.)

열하는 지금의 중국 허베이 성 동북부 러허 강 연안의 청더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청나라 황제 건융제의 여름 별장이 있어 황제별궁 혹은 피서별궁으로 불렸다.

산수가 수려하고 온천이 있고 사냥하기에 적당했다. ( 1994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그 이전 1793년 영국 사절단을 황제가 접견했고 1860년 제 2차 아편 전쟁 당시 피신해온 황제가 이곳에서 사망했다. 1933년 일본은 만주국을 세웠다.)

당시 조선 조정은 청 황제의 칠순잔치를 기념하기 위해 대규모의 조공단을 꾸렸다. 이들은 각종 희귀한 진상품을 싣고 열하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한양을 떠났다.

1780년 6월 24일 청나라 건융 45년, 조선 정조 4년, 사절단의 총책임자인 박명원의 수행비서로 팔촌동생 박지원이 동행했다. ‘평생에 한 번 뿐인 꼭 가봐야 할 장쾌한 여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열하로 향하는 첫날부터 도착하기까지의 장장 4개월간의 일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기록했다. ( 글을 쓰는데 4년이 걸렸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일행은 많고 기일은 정해졌으나 일기는 불순하고 특히 비가 많이 와 말을 타고 강을 건너기가 힘겨웠다.

첫날의 서두에서 박지원은 ‘아침에 비가 내렸다. 온종일 오락가락.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에서 노숙했다. 밤에 큰 비가 내리다가 곧 개었다.’고 썼다. 그날의 날씨로 시작된 일기는 무려 26권 10책으로 마감될 때까지 이어졌다.

물빛이 오리 대가리처럼 푸른 압록강을 다섯 척의 배를 나눠 타고 넘은 후 박지원 일행은 심양 광녕 산해관 북경을 거쳐 목적지인 열하에 도착했다.

일단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재미있는 내용위주로 간략하게 적어 보자.

3일 후인 27일, 날이 새기 전에 길을 떠나 30 리를 더 갔다. 하인 장복이가 자물쇠를 잃어 버렸다.

압록강에서 120리에 이르는 책문에 도착해서는 그 곳 문물이 우리보다 앞선 것을 보고 질투심으로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다음날 강태영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벽돌 쌓는 법과 기와 이는 법에 대해서 유심히 살펴보고 성을 쌓을 때 벽돌이 나은지 돌이 나은지 정진사와 언쟁을 벌였다.

술내기 투전을 벌이고 만족 여자를 보고 결혼 행렬을 구경하고 보잘것없는 책 목록을 베끼고 대가로 청심원을 주었다. 며칠을 비가 와서 머물다가 마침내 끝없이 펼쳐진 요동 벌에 이르러 '한 바탕 울만한 자리'라고 감탄했다.

한족 여자를 처음으로 보고 다음날 60 리를 와서 심양에 머물렀다. 술 한 잔 걸치고 '누가 찾거든 뒷간에 갔다'고 이르라고 전한 뒤 골동품 가게와 비단가계를 구경하고 날이 새도록 놀았다.

이틀 간 잠을 못자 이동하는 중에 말 위에서 졸았으며 그 때문에 구경거리인 약대(낙타)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늙다리 참외장수에게 속아 일행이 훔치지도 않은 참외 값으로 백 푼 돈을 빼앗기고 상갓집 구경을 갔다가 난데없이 문상객 취급을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 중국에 와서 본 것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이 최고 장관이었다고 적은 날은 7월 15일이다.

호행통관 쌍림이는 조선말로, 장복이는 어수룩한 중국말로 서로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는데 처음 하는 장복이 말이 더 좋아 조선말이 배우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고교보에서는 조선 사신 일행이 그 전해에 잃어버린 돈 천량 때문에 그 곳 주민 여러 명이 죽은 관계로 반응이 냉담했다.

청돈대서 해돋이 구경할 때는 강원도 총석정 생각이 났고 ( 연암은 총석정 해돋이 장면을 담은 장시를 <열하일기>에 실었다.) 점술이 용하다는 사람을 만나 점은 보지 않고 위인들의 생년월일을 베끼다가 천기누설이라고 서로 웃음을 주고받았다.

털모자 점에 들러서는 양털 모자를 조선이 수입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은이 모두 중국으로 가고 있다고 아쉬워했고 산해관에 들러서는 지금껏 보고 놀란 것이 모두 이곳을 본 뜻 것임을 알만큼 빠져 들었다.

진사 서학년의 집에서 골동품을 구경하고 한 문공의 사당에는 함께 갈 사람이 없어 평생 꿈꿔 왔던 곳을 가지 못해 애석했으며 우연히 만난 호응권의 화첩 목록을 적었다.

양평부에서 장 구경을 한 다음날에는 전날 먹은 고비나물 때문에 속병에 생겨 고생했고 호형항의 집에서는 박제가가 써놓은 이덕무의 시를 보았다.

길 떠난 지 한 달하고 사흘 후 그러니까 7월 28일 조선 사람들이 사는 고려보에 도착했다.( 이들은 인조를 삼전도에서 무릅꿇린 청태종이 돌아갈 때 인질로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고려보의 조선 사람들은 처음에 사신이 오면 고국 사람이 왔다고 극진한 환대를 했으나 이들이 자신들이 물건을 훔쳐가고 못살게 해 사신을 소 닭 보듯이 하고 사신 일행은 하인들도 욕하고 괴롭혀서 서로 간에 원수지간이 됐다. ( 슬픈 일이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사람 조심하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날 모두 80 리를 왔는데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점방 주인이 자신에게 수양아버지가 되라고 부탁해 거절하느라 진땀을 뺏으며 심유봉의 집에 걸려 있던 <호질>을 정진사와 나누어 베껴 썼다.

말은 베껴 썼다지만 연암의 창작 글인데 이는 범이 양반의 못된 점을 꾸짖는 내용이어서 자신이 화를 면하기 위해 이렇게 꾸며 놓았다고 한다. ( <열하일기> 중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는 부문이다. 워낙 길이가 짧으니 이것만이라도 따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삼하현을 지날 때는 홍대용에게 부탁받은 편지와 선물을 손유의에게 전해 주려고 찾아갔으나 없어 보지 못하고 다음날 8월 1일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압록강과 무려 2030리 떨어진 거리였다. 북경에서는 책방에도 가고 이덕무가 만났다는 당원항네도 들르고 유리창도 구경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 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공자의 글귀도 생각했다.

열하로 와서 황제의 만수절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고 가지 못하고 북경에 남는 장복이와 헤어질 때는 울고불고 한 바탕 난리를 피웠다.

자금성을 끼고 열하로 출발한 지 이틀 만에 견마잡이 창대가 말발굽에 발을 찍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날 황제가 보낸 군기대신은 조공 일행이 9일까지는 열하에 대야 한다고 알려와 마음이 조급했다.

만리장성에 도착해서는 물대신 새벽에 산 술로 먹을 갈아 별 빛 아래서 성벽에 이름 석자를 새겼다.

날짜를 맞추려고 나흘 동안 눈 한 번 제대로 못 붙이고 쉬지 않고 말을 달리니 마중 나온 내시가 일행들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갔다.

태학관에 머물 때는 2품 끝자리에 서라는 황제의 조서를 읽었으며 총책임자 박명원이 황제에게 감사의 글을 올리라는 독촉의 말을 들었다.

이날 닷 새 만에 처음으로 자리에 누었으며 다음 날 피서산장에 들러 황제가 내리는 음식을 먹고 황제의 여섯 째 아들과 몽고 왕을 알현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황제의 반선 라마를 알현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야 하나 잠시 논란이 있었으나 다음날 라마를 알현하고 금불을 하사 받았다.

드디어 만수절 당일이다. 하례식에 참석한 후 황제가 내린 여지즙을 술인 줄 알고 먹었으며 악기 구경을 하고 나오다가 수 백 필 말 떼를 만났다.

8월 14일 황제는 조선 사신에게 이제 북경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신들은 열하를 떠나 북경으로 향했다. 황포령을 지나다가 황제의 친조카 예왕을 만났으며 조느라고 보지 못한 약대를 보았으며 북경에 도착해서는 헤어졌던 일행들과 합류했다.

장복이를 만난 창대는 황제를 만났다거나 상금 천냥을 받았다고 속였다. 이날이 8월 20일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여기서 끝난다. 북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적지 않았다. 또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한양에서 5월 25일 떠났으나 한양에서 압록강까지의 기록도 없다.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 <열하일기>는 당대의 칭찬을 받기 보다는 비난의 대상이 됐다.

100여 년 간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당시 조선 조정의 주시 대상이었다. 비록 명나라가 망한지 10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조선이 섬겨야 할 나라는 오랑캐의 나라 청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인 명이었다.

그런 명을 좀 얕잡아 보고 청의 문물을 찬양했으니 연암이 필화 사건에 연루돼 참살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도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좋은 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기보다는 더 큰 생명력을 지니게 마련이어서 필사본만 전해지는 것이 아홉 종에 이르고 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점잖은 양반네의 언어가 아닌 조선의 토속 말을 사용했으며 심지어 따라온 종들과 농담을 주고받은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지금까지 써온 상투적인 글이 아니라 연암 이전에 누구도 쓴 적이 없는 상놈의 언어가 난무했으니 그 언어는 소설 문체였다.

거기다 웃음 코드가 가득했고 잘못된 것을 과감하게 풍자했고 우리문물이 청에 뒤져 빈곤하니 배워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양반들은 뜨끔했고 내놓고 읽기 보다는 숨어서 읽었다. 그리고 배우고 때로 익히는 대신 저주를 내렸다.

예술과 문예를 사랑했다고 하는 정조도 <열하일기>를 읽고 나서 노발대발 했다고 하니 그 당시 이 책이 가져다 준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정조는 패관잡기를 터부시 했으며 순정문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고 박지원의 문장이 저속한 것을 문제 삼았다.

요즘 문체가 이 따위로 변한 것은 박아무개의 <열하일기> 때문인데 사고 친자가 마땅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니 속히 순정한 글을 지어 속죄하라고 소리쳤다.

이에 박지원은 죽지 않고 살기위해 격식을 갖추고 예를 한껏 차린 그야말로 허례허식에 찌든 속죄문을 정조에게 올렸는데 이 역시 명문이라 정조가 그만 웃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연암이 죽고 나서 80여년이 지나서 <열하일기>는 그 위대함이 다시 주목을 받았으며 오늘날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절대 문장으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뒤늦게나마 이 책의 가치를 직접 체험한 것은 개인적으로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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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bgusp@news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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