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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바로 앞에 속도계, 걷는 속도로 확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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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바로 앞에 속도계, 걷는 속도로 확 줄인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3.2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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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 아니 눈이다. 자세히 보니 진눈깨비다. 춘분에 이게 왠 일인가 싶지만 아프리카 사막에 얼음이 어는 날씨라면 이 정도는 모른 척 해야 한다.

아파트 위에서 내려다보니 걷는 사람이 우산을 쓰고 있지 않아서 서둘러 내려 왔는데 '이러니 당황스럽네요', 라고 속으로 비 맞은 중처럼 중얼 거린다.

이슬비라도 서울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뛰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도 가뿐하게 움직인다. 작은 쪽문을 빠져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일방통행 도로를 지나 계단 몇 개를 건너뛰고 천변으로 들어선다.

비에 젖어 반짝이는 돌다리를 건넌다. 이번에는 한강 쪽이 아니라 관악산 방면이다. 복개한 지붕이 위에서 내리는 것을 막아준다. 오늘은 시멘트를 머리에 이고 달려야 한다.

믿는 구석은 바로 머리위에 있었다. 슬쩍 머리를 만져 보는 것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굳은 시멘트에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떨어지는 것을 머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확인했다. 미리 그러리라고 알고 있었지만 현실이 되면 예상이 맞아 떨어진 것처럼 흡족한 기분이다. 그 기분 안고 온 몸을 앞으로 들이 민다.

이쪽으로 달리는 것은 처음이다. 걷기는 한 두 번 했으나 폐쇄공포증 때문에 더는 오지 않았다. 갈수록 트이기 보다는 좁아지고 줄어드는 길이다.

비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방해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속도를 낸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을 치고 나갈 때 마치 원시림에 첫 발을 내딛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벅차다.

사주경계까지는 아니지만 좌우는 둘러본다. 헉 숨이 차오른다. 처음이니 가벼운 걸음으로 링에 올라 소개를 받기 전 선수처럼 워밍업 하는 것을 잊었다.

걷는 수준으로 속도를 확 줄인다. 바로 앞에 속도계가 내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화들짝 놀란다. 무사히 벌점을 피했으니 쓸어내린 가슴을 달래며 여유를 부린다. 그러자 보이자 않던 것들이 가로등 불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쪽은 벽에 막혀 있고 왼쪽은 도림천으로 뚫려 있다. 물은 보이지만 유속이 매우 느려 흐르는 지 멈춰 섰는지 구분이 어렵다.

길 위의 사람들은 좀 체 마주치지 않는다. 없으니 되레 편하다. 무도춤을 추는 그 사람처럼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본다. 비틀 때 근육이 당겨지면서 풀어지는 느낌이다. 몇 번을 더 시도해 보고 원래 상태로 팔을 직각으로 해서 앞뒤로 휘두른다.

이인은 서서히 고개를 든다.

멀리 보이는 풍광이 마치 열차 터널을 지나가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나타난다. 기둥 들 사이로 빛이 반사되면서 갈수록 철로처럼 작아졌다 커지기를 반복한다.

다른 곳은 어둡고 네모난 사각 기둥 사이로 보이는 데는 밝아서 그로테스크한 기분마저 든다. 화가나 사진가에게 좋은 영감을 주는 그런 모습이다.

다음에 이곳으로 온 다면 자동 후레쉬를 끄고 핸드폰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머릿속에 저장한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곳을 지날 때는 꼭 사고치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비는 오지, 사람은 없지, 천장은 막혀 있고 빛은 흐릿한데 물 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나지, 이런 분위기에서 무언가 일어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다.

관군에 쫓기는 임꺽정이 시야에 어른거린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숨기에 알맞은 크고 굵은 기둥들이 얼마든지 있다. 칼을 뽑아 가슴에 일자로 세우고 지나가는 병졸의 목을 몸에서 떼어내거나 표창을 던지거나 쇠도리깨를 휘두르기에 적당하다.

기둥을 지나자마자 뒤를 돌아본다. 다행이다. 꺽정이는 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다. 다시 고개를 숙인다. 들어봤자 볼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래야 좀 편하다.

한 5년 전 쯤 목 디스크로 고생한 경험이 생생하다. 그 때는 왼쪽 팔뚝은 물론 다섯 손가락 까지 저릿 거리는 통증으로 이러다가 해야 할 일도 못하고 세상 볼장 다 보는 것은 아닌가 지레 겁을 먹었다.

심리적으로 자극받아 흥분하는 현상이 아닌 것을 알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심해지자 걱정이 늘었다. 그래도 갈 때까지는 가보자고 병원을 뒤로 미뤘다. 전기가 쉬지 않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불쑥 불쑥 찾아 왔다.

주물러도 소용이 없어 그 부분을 이쑤시개로 찔러 보기 까지 했다.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했다. 그것이 이인의 특기이므로 이번에도 최근의 일에서부터 먼 과거 혹은 가까운 어제 일 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딱 이거다 하고 결론을 내리고 나니 속이 편했다. 저리는 왼 팔은 팔꿈치를 십여 바늘 넘게 꽤 맸고 뼈가 부스러져 이어 붙인 곳이다.

그 때 수술을 담당했던 외과의사는 자신이 수술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렇게 한 것처럼 뼈가 약하다느니 금간 것이 아니어서 힘들었다느니 하면서 고난도 수술을 잘 끝냈다고 만족해했다.

눈 뜨고 거짓말 잘하는 과장은 실력이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수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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