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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임꺽정>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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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임꺽정> (1928)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3.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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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을 막 읽으려고 할 때 벽초 홍명희의 자필 편지가 안동에서 발견됐다는 짤막한 소식이 전해졌다.

한문으로 된 붓글씨는 22살 청년 홍명희가 1910년 부친상을 치른 후 감사함을 안동의 풍산 김씨인 김지섭에게 전하는 내용이다. (부친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재직 시 나라가 망하자 자결했다. 김지섭은 안동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24년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죄로 감옥에 갇혀 옥사했다. 이 편지로 벽초와 독립운동가의 연결고리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때가 한 달 전쯤이니 지금 이 순간 새로운 감회가 든다.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작가의 경험이 작품에 아니 녹아 들 수 없으므로 그런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경기도 양주 출신의 꺽정이가 겨우 8,9세 때 벼 한 섬을 들 정도로 힘이 장사인 것은 다 들 알 것이다. 커서는 숭례문 담장을 가볍게 뛰어 넘고 칼을 잘 쓴다. 천민의 자식이 그러면 역적질하기 쉬워 부모는 죽이기도 했는데 다행히 부친 돌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름도 걱정스러운 걱정이는( 걱정이, 걱정이 하다가 꺽정이가 됐다.) 자라서 몸도 크고 머리도 컸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그는 자신의 출신성분을 한탄했다. 양반이 있고 상놈이 있는데 상놈 중에서도 자신은 최하층인 쇠백정이었다.

 

돌이가 그러니 꺽정이도 당연히 그랬다. 신분은 대를 이었다. 힘센 백정의 자식은 슬펐다. 양반이 무엇을 만들라고 해서 힘겹게 만들어 줬는데 형편없다고 타박하고 값으로 쌀을 주기를 커녕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것을 보니 꺽정이의 울분은 땅보다는 하늘로 향했다.

그는 산천을 떠돌았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전국을 돌았다. 천한 백정으로 양반의 심부름만 하다가 평생을 사느니 아주 죽은 사람처럼 유람이나 다니자고 작정하고 나섰다.

산천은 그가 보기에 좋았다. 산은 높았고 내는 깊었다. 그는 또다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이 놈의 세상, 싹 무너져 내려라.

하지만 그것은 견고한 지라 꺽정이가 그러라고 해서 그러지 않았다. 그러던 그 어느 날 이었다. 그는 그 같은 생각을 자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승도 만나도 동료도 만나고 후배도 만났다.

그렇다. 꺽정이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세를 규합해 뜻 맞는 자들과 함께 의형제를 맺었다. 지금도 있는 안성의 칠장사에서 그와 똘마니 칠 명은 결의형제를 맺는다. 이른바 꺽정이와 졸개들. 졸개라고 했지만 그들은 꺽정이 말고는 누구 밑에서 있기 어려운 두목위에 있는 두령들이었다.

먼저 백발백중 명궁을 자랑하는 이봉학이가 있다. 종실서자이며 꺽정이의 어릴 적 친구로 꺽정이가 없을 때 대장 노릇을 하는 양반부스러기다. 왜군이 쳐들어 왔을 때는 관군으로 공을 세웠으며 벼슬아치 경험이 있다.

박유복이는 양반댁 행랑어멈으로 유복자로 태어나 앉은뱅이로 오랜 세월을 버티다 극적으로 정상생활을 하게 된 인물이다. 표창 던지기의 달인이다.

곽오주는 머슴살이를 하다 그 집 아들이 보쌈을 해온 여자와 결혼해 아들을 낳지만 곧 죽는다. 이런 트라우마 때문에 아이 울음소리만 나면 광증을 일으켜 아이들을 마구 죽인다. 쇠도리깨를 잘 쓴다. 두령 중에서 최고의 무식함을 자랑하지만 의리에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백두산에서 태어난 황천왕동이는 축지법을 쓰듯 발걸음이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소식을 전달해 주고 전달받는데 특급 우편 같은 역할을 한다. 꺽정이의 손아래 처남으로 잘 생기고 예의가 발라 귀염둥이 노릇을 톡톡히 한다.

돌 팔매질의 일인자 배돌석이는 복수의 화신이다. 자신의 마누라가 집주인과 바람나자 둘 다 한 칼에 목을 벤다. 새로 결혼한 여자가 또 그렇게 되자 이번에도 두 말없이 죽인다. 내 여자의 바람은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한 없이 너그러워 여색 질은 빠지지 않는다.

소금장수 길막봉이는 꺽정이 만큼은 안 되지만 다른 두령에 비하면 힘이 세다.

일당백을 하는 이런 인물들이 청석골에 모여 근거지를 삼고 화적질을 일삼는다. 백성들은 관리들보다 화적들에게 더 호감을 보인다. 화적에게 뺏기는 것보다 법의 이름으로 수탈하는 것이 더하면 더 했지 덜하기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여서 술을 먹는다. 틈나면 여편네( 책의 표현 그대로)나 기생과 놀아난다. 꺽정이도 청석골 정부인 말고 서울에 4명의 부인이 따로 있어 아침저녁으로 이 집 저집을 돌아다닌다. 동하면 겁탈하고 툭하면 복수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하고 싶어서 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무슨 이념이나 철학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먹고 사는데 불편하면 편하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한다.

의적이니 대적이니 하지만 그런 것과도 거리가 있다. 부자를 털어 가난한 자를 주거나 백성의 억울한 일을 대신 값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되레 그들처럼 천한 자들의 하루 식량을 뺏기도 한다.

칠두령의 세는 나날이 커지고 세가 커질수록 소문이 흉흉하자 나라에서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조직한다.

하지만 꺽정이 패를 당하지 못하고 번번이 패한다. 급기야 임금의 칙령으로 이들을 멸하기 위한 명령이 떨어지고 순경사가 급파된다. 꺽정이 일행은 청석골을 나와 자모산성으로 잠시 피한다. 일보 전진을 위한 후퇴라고나 할 까.

여기서 임꺽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연재를 시작하다 작가가 신간회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중단되기도 했고 신문사가 폐간돼 연재가 이어지지 못하기도 했다.)

무려 10권으로 제본된 책을 덮을 때 과연 꺽정이의 운명이 어떻게 될 까 조마조마한 심정은 줄어들기 보다 더 심해진다. 그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백성을 위하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본이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쓰면서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했다. 실록에 따르면 임꺽정은 명종 16년 (1561년)에 잡혔다. 어떤 과정을 거쳐 잡혔으며 그의 최후가 어떻게 마무리 됐는지는 기록에 없어 다만 추측할 뿐이다.

임꺽정은 우리 근대 문학을 만방에 떨친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다. 어떤 작품도 이 작품과 견줄만한 것이 없다. 어쭙잖은 교훈이나 왕조 중심의 영웅적 서사가 아니다. 당시 서민들의 삶을 질펀한 우리말로 되살려낸 그야말로 ‘조선말의 무진장한 노다지’가 책장마다 가득하다.

리얼리티 문학의 최고봉이며 화려한 문장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말로 쓴 이런 작품이 있다는 것은 드러내 놓고 자랑할 만하다.

: 의형제에는 속하지 않지만 서종사 서림이라는 인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 마디로 유비의 제갈량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꾀로 여러 번 위기를 넘겼다.

그가 관군에 잡혀 조정에 귀순했을 때 서종사는 서림이 놈으로 격하돼 꺽정이 패의 원수가 됐다. 꺽정이가 그에게 복수하지 못했으므로 그는 아마도 서림이의 모사대로 계약을 꾸민 순경사에 체포되거나 죽었을 것이다.

서림이가 귀순한 것은 꺽정이가 의리를 저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잡혀서 고문을 받고 그의 식솔들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칠두령 같으면 그 같은 상황에서 죽음을 택했겠지만 그는 의형제를 맺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의리가 애초부터 없었다. 그의 귀순을 나무랄 수는 없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꺽정이 칠형제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을 영웅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런 무모함 때문이다. 이런 인물이 500여 년 전에 이 땅에서 활략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거짓말을 일삼는 노밤이의 활약상은 드라마의 빛나는 조연으로 손색이 없다.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 갖바치다.

2편에 해당하는 피장 편에 중심적으로 등장하는 갖바치는 꺽정이 패에 없는 어떤 정신을 주었다. 사주명리에 밝은 갖바치는 그에게 지식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서로 원하지도 않았다. 그에게서 지식을 배워 잰 체 했다면 꺽정이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역사적 인물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비극적으로 죽은 조광조나 황진이와 서화담은 물론 이황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나타나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접목한다. 최영 장군이나 대왕대비의 무당굿은 시각적 효과가 만점이다.

10권을 다 읽어도 좋지만 따로 따로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단락 진 구성이 돋보인다.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홍명희는 동양문학은 물론 러시아나 영미 혹은 프랑스 등 당시 서양문학을 완벽하게 섭렵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많은 공부와 다양한 외국 서적 독파가 임꺽정의 모태가 된 것이다.

한편 임꺽정은 차별에 치를 떨었으나 그 자신이 대장이 돼서는 두령이나 두목 혹은 졸개들에게 명령을 하고 차별을 밥먹듯이 하는데 이것은 인간사의 아이러니다.

벽초는 월북 작가다. 그는 월북해 김일성 아래서 부주석 까지 지냈다. 그래서 남에서는 그의 이름은 물론 작품까지도 금기시됐다. 이광수나 최남선, 김동리 등이 환영받을 때 그가 역사의 그늘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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