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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19 18:50 (화)
272. 야행(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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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야행(1977)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1.1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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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감독의 <야행>은 화질이 좋다. 주인공 여배우(윤여정)가 떨어뜨리는 땀방울까지 선명하다. 디지털로 복원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닷없이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점프 컷’ 때문이라고 상영 전 영화는 자막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 이어 조연출 대신 감독보로 김호선, 주영중이 소개된다.)

장면이 비약적으로 돌출한다는 의미의 영화 편집 용어가 등장 했다는 점을 감안해 볼 사람만 보라는 의미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영화의 연속성이 갖는 흐름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그러려니 해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김승옥 원작이라 큰 무리는 없다고 해도 어리둥절할 때가 여러 번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잃어버린 화면이 못내 아쉽다. 어쨌든 영화는 괴기스런 음악과 함께 당시 서울의 하늘아래를 비추고 차들은 붐비지 않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음악은 호러 물 같은 공포감을 준다. 내용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초반부 음악이 왜 그리 음산한지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들이 분주하다. 동전이 보이고 금고가 있다. 은행의 풍경이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모인 직원들은 부도난 회사에 대해 어디 그런 일이 한 두 번이냐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농담한다. 식 올리기 전까지 나온다는 말로 미루어 동료 가운데 누군가가 결혼을 하는 모양이다.

윤여정이 매캐한 매연을 뿜는 버스에서 내려 헌병을 쳐다본다. 박박 머리는 밀고 고개를 세운 그는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눈빛을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가 바바리코트를 젖히고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로 스타킹을 걷어 올리기 때문이다. ( 의도적인 이 장면은 나중에도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유혹의 의미인지 넘쳐 나는 성적 욕망을 주체할 수 없는 ‘바바리 걸’의 보여주기 인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어 알 길이 없다.)

퇴근한 그녀는 잠든 것처럼 소파에 누워 있다. 잠시 후 남자( 신성일)가 들어온다. 은행 동료 박대리다. 미스리( 이름대신 그렇게 불린다.)를 안은 그는 연 방문을 뒷발로 닫고 침대로 가볍게 던진다.

하기 전에 여자는 혼전이라거나 처녀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으로 보아 아직 남자에게 확실한 결혼 다짐은 받지 못한 모양이다.

남자는 무시하고 그녀의 귓가에 알 수 없는 밀어를 쏟아내면서 씩씩 거리는데 힘이 약해서 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인지 오래하지 못하고 곧 떨어진다. 여자는 갑자기 손도끼로 손을 맞은 듯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정신을 차린 여자는 자신들이 동료보다 먼저 만났으나 결혼은 나중에 한다고 남자를 압박한다.

“ 난 결혼 안 해, 결혼식은 시시해.” 남자는 퉁명스럽게 던진다.

여자는 약국에서 마스크를 산다. 감기에 걸려서라기보다 자신의 큰 얼굴을 감추기 위한 제스처로 보인다.

그녀는 덕수궁을 걷는다. 꿩도 있고 사슴도 있다.( 당시에는 궁궐 한쪽에 작은 동물원이 있었나 보다.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참고가 되려나.) 의자에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스리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황급히 피한다.

술집에는 취한 남녀가 또 그렇게 하고 있다. 여자는 이번에는 태연히 앉아 있지만 취한 남자들의 추근 거림이 예사롭지 않다. 다시 바람 찬 거리로 나와 택시를 타는 여자.

합승한 택시의 뒷 자석에서 남녀는 또 그런 일을 한다. 여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몸은 달아오른다.

집에 온 여자는 침대에 엎드려 거칠게 운다. 검은 속옷 속에 감춰진 열 오른 몸을 식혀주고 달래주는 남자는 집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상상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새 여자는 기차 안에 있다. 앞자리의 남자가 여자에게 무언가 먹여준다. 계란 프라이를 하는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장면은 바뀌어 박대리는 “날 두고 고향으로 가, 남편은 남편이다” 라고 화를 낸다. (이런 장면도 상상인지 현실인지 헷갈린다.)

그녀는 고향의 공기를 마신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들이 등장한다. 그 중 한 사내가 다가와 양조장 댁 맏아들인 나를 알아보느냐고, 상처 했다며 또 만날 수 있느냐고 말을 한 후 부르릉 거리며 사라진다.(이후 이 남자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지만 둘이 무슨 짓을 하지 않고 진도도 나아가지 않고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

교복을 입은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달린다. 그러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쓰러진다. 박대리의 모습이 나오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남자가 등장한다. 현실과 상상으로 또다시 현기증이 인다.

선생은 말한다. 나 휴가 끝나면 월남 간다. 선생님을 부르는 여고생의 목소리는 애처롭고 표정은 가지 말라고 잡는다. 난, 더 이상 네 선생님이 아냐. 선생님은 선생님이 아니라고 자신의 신분을 거부하더니 널 그냥 두고 갈 수 없다며 여자의 몸을 세게 덮친다.

전쟁이 끝나면 넌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 거고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널 차지해야 겠다는 그런 의미의 대사가 이어진다.

처음에 여자는 완강히 거부하지만 곧 받아들인다. 이른바 해변의 정사다. 아래서 몸부림치던 그녀는 선생님 죽지 마세요라고 부탁인지 애원인지 늘어놓다가 함께 어울려 그 일을 무사히 마친다.

연지곤지 찍는 모습도 보이고 바느질 하는 엄마의 손놀림도 화면에 비친다.

그녀의 첫 남자 였던 선생은 전사했다. 월남에서 죽은 그 사람이 공연히 네 신세만 망쳐 놨다고 어머니는 미스리의 신세를 한탄한다.

기차 안 풍경이 새삼스러울 무렵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결혼은 시시하다고 남자가 했던 말을 대신한다.

고향을 다녀온 여자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꽃 한 송이 들고 국립묘지를 찾는다. 선생님이 그 곳에 있다. 그 곳을 갔다온 그녀는 이제 홀가분해졌다는 듯이 방청소를 하고 박대리를 향해 고함을 친다."이 쌍년아, 너는 남편을 어떻게 보니. 시골서 바람이라도 났니?"라고 욕이라도 하라도 남자를 다그친다.

자신을 정복해줄 남자, 힘으로 제압해 줄 그런 남자를 그녀는 원하는 것일까. 남자는 여자가 아직도 결혼의 환상 속에서 사는 것으로 착각한다. 결혼식은 공중변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일갈 하는 것을 보면.

오늘부터 피임약은 필요없다 고 소리친 남자는 파란팬티를 자랑하며 노란 옷을 벗기는데 열중이다.

출근하는 남자를 뒤로 하고 여자는 이틀 남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아파트 단지를 경쾌한 걸음으로 벗어난다. 볼링을 치고 오락실을 가고 저녁까지 다리가 풀릴 때까지 논다.

결혼을 최고의 목표로 간직한 여자가 결혼 같은 건 시시하다고 말하는 여자로 바뀌는 과정이 석연치 않지만 영화는 여자의 변심으로 방향을 뜨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인형의 집>의 로라처럼 금방이라도 집을 뛰쳐나갈 것 만 같다.

이후에도 화면은 자꾸만 점프를 한다. 줄거리를 계속 옮기는 것도 벅차다. 윤여정이 어떤 여자로 어떤 과정을 통해 변신하는지 잘 알 수 가 없으니 답답하다. 하지만 영화가 세련됐다, 무언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은 분위기는 감지된다.

필름이 잘렸어도 한국영화의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언젠가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이 된다면 찬찬히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싶다.

국가: 한국

감독: 김수용

출연: 윤여정, 신성일

평점:

 

: 여자가 겁탈을 당하는 장면이 후에 등장한다. 지금의 조선호텔 인근의 밤거리에서(제목이 <야행>인 것이 순간 떠오른다.) 수갑이 채워진 채 여관으로 끌려가는 여자는 공포인지 다가올 것에 대한 기대감인지 표정이 무거운 것 같으면서도 가볍다.

끌려간 여자는 적극적으로 반항을 하는 것으로 보아 당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신원 미상의 남자가 앞이 아닌 뒤에서 옷을 벗기고 욕심을 채울 때쯤이면 그녀는 선생님에게 했던 것처럼 온 몸으로 반응한다. 

정신은 아니어도 몸은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니면 정신까지 동화됐는지는 모른다.

그 시각 박대리는 새벽 한 시 임에도 돌아오지 않는 여자 때문에 잠옷만 입고 밖으로 나간다. 그는 담배를 피면서 서성이다가 마침 지나가던 순찰을 도는 헌병에 가볍게 인사를 한 후 곧 눈오는 날의 추위 때문인지, 기다리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집으로 들어간다.

다음 날 여자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출근한다. 그리고 등 뒤에 있는 박대리를 여보!라고 불러 그 소리를 들은 행원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이제 그녀는 쓰다 벗다 하던 뿔테 안경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안경을 벗은 것이 처녀의 짐을 털고 홀가분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얽매이기 보다는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해방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그녀는 다시 거리로 나선다. 마치 거리의 여자처럼 그녀는 그녀에게 달라붙는 남자들에게 그렇게 하기 보다는 인상을 한 번 쓰는 것으로 가볍게 뿌리친다.

그 남자들 가운데 얼마 전에 결혼한 동료 남자도 있다. 술 취해 수작을 부리다 그녀인 것을 알고 당황해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묻는다. 

신혼이 즐겁느냐고. 남자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신부가 처녀가 아니라고, 세상의 처녀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처녀 타녕이다. ( 이 즈음에서 남과여의 주제곡이 나오는데 괴기스런 음악보다는 듣기에 좋다.)

박대리는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한다. 혼인신고하자고 손을 잡아끄는데 이미 늦었다. 처녀를 위해서겠죠? 당돌하게 묻는 그녀. 잠든 남자를 기차에 놔두고 홀로 내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다음날인지 며칠 후인지 국립묘지 앞의 헌병에게 그녀는 그녀의 허벅지를 한 번 더 보여 주고 헌병의 눈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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