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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3:17 (금)
271. 장마(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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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장마(1979)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12.30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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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 해의 마무리 영화는 유현목 감독의 <장마>다. 골라서 일부러 택한 것은 아니다.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윤흥길 원작의 <장마>는 6.25 전쟁이 한 창이던 어느 무덥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비가 내리는 장마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하기에 딱 좋은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장마와 전쟁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죽는 것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시체위로 비까지 억수로 쏟아지면 슬픔은 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호랑나비가 춤추고 온갖 꽃 들이 만발한다면 모를까.( 그래도 아닌가.)

전쟁이 시기를 고르지 않듯이 죽음 역시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남도의 어느 마을이다.( 인민군이 전주, 이리, 군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표현과 그 쪽 지방의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아.) 잘 지은 기와 집 한 채가 멋스럽다.

이고 지고 오는 한 가족을 마중 나온 다른 가족은 사돈 지간이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피난 오는 손님을 살림이 넉넉해서인지 떨떠름하기 보다는 반가운 기색으로 맞는다.

어린 꼬마는 놀기에 여념이 없다. 먼 산에서는 봉화가 타오르고 총소리가 들려도 철모에 담을 미꾸라지 잡는 것이 신난다. 붉은 기를 들고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와도 무덤덤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다르다. 세상이 바뀌자 밀주 단속을 하면서 주민을 괴롭히고 땅을 힘으로 빼앗은 지주들은 타도 대상이다. 삼촌( 이대근)이 붉은 완장을 차고 응징하는데 앞장선다.

서울서 온 외삼촌( 강석우)은 반공운동을 했다. 완장을 찬 친삼촌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인민군 치하에서 외삼촌은 대밭에 숨어 살고 숨은 그에게 간혹 총을 든 삼촌이 찾는다.

부역 질 말고 너무 나대지 말라고 외삼촌은 충고하고 친삼촌은 대학 나왔다고 깔보지 말라고 나는 해방 전선에 참여하러 간다고 핏대를 올린다.일촉 즉발의 위기가 감돈다.

전쟁이 빨리 끝났더라면 그래서 둘이 더 이상 대결하지 않고 서로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감정으로 되돌아 왔다면 두 안 사돈 역시 악마 같은 짓을 하지 않고 편한 여생을 보냈을 것인데 이런 가정은 결과가 너무나 끔찍해 하나 하나마나하다.

소대장으로 나간 3대 독자 외삼촌은 공연히 가서 개죽음 하지 말고 숨어 있으라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생이빨이 뽑히는 꿈을 꾼 외할머니( 황정순)는 이미 아들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의 슬픔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죽음은 나의 것이고 삶은 아들의 것인데 세상도 무심하지 비만 억수로 쏟아진다. 엄니는 말한다. 빨갱이들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었다고, 산 속에 사는 놈들 다 죽으라고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터주 대감님을 찾으면서 한 맺힌 울분을 토해낸다.

 

사돈댁( 김신재)이 그 모습을 본다. 빨갱이가 다 죽으면 둘째 아들도 죽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저주의 소리를 그냥 듣고 지나가기에는 오갈 데 없는 식솔을 먹여 살려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용서가 안 된다. 

두 늙은이 의지 하면서 살자던 다짐은 어느 새 미쳐도 곱게 미치라는 입에 담기 어려운 쌍욕으로 바뀐다.

큰아들은 엄마편도, 그렇다고 장모편도 들기가 어렵고 며느리( 선우용녀) 역시 엄니를 따를 수도 어머니를 역성들지도 못하고 바늘방석이다.

이번에는 국군이 들어온다. 교회 첨탑에는 인공기 대신 태극기가 바람에 날린다. 국군은 부역자를 소리 소문 없이 처분하는데 화면에는 인민군이 그랬던 것처럼 죽창으로 찌르거나 일렬로 세워 놓고 하는 총살집행 장면 등은 나오지 않는다.

꼬마는 초코릿으로 유혹하면서 정보를 캐는 형사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삼촌이 산 속에 들어간 사실을 털어 놓는다.

아버지가 대신 끌려가고(죽지 않고 살아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정상참작이 됐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삼촌 팔아먹은 놈이라고 집밖으로 나가면 다리몽둥이 분질러 버리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친다.

돌담 밖에서는 아이들이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가자’고 노래 부르지만 아직 족쇄는 풀리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잠든 아이의 고추를 만지면서 네 외삼촌 같이 네 붕알도 외솔방울처럼 생겼다면 울음을 삼킨다.

어느 날 산에 간 삼촌이 들이 닥친다. 권총도 두 자루나 차고서.

어미는 한 번 온 자식은 다시 돌려보낼 수 없다며 피를 토하고 형은 전세는 백중지세고 휴전협정이 막바지이니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설득한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주저하는데 그를 찾는 산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따리를 든 삼촌은 벌떡 일어나 데리러 온 사람들과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뒤돌아 보는 눈빛은 쫓기는 짐승처럼 형형하다. 자수의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 그는 이제 산으로 가면 살아서는 집에 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방바닥에 귀를 댄 외할머니는 구렁이 울음소리를 알아챈다.

강물은 불어난다. 멀리 시집간 누이와 어머니는 읍내 전투에서 살아남아 산으로 도망친 아들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는 점쟁이를 찾아 나선다. 복채를 든든히 받은 무당은 아들은 살아 있고 모월 모시에 집에 온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 날이 되자 온 식구는 집안 잔치를 벌인다. 동네사람들을 불러 먹인다. 하지만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용해도 시간까지야 맞출 수 없다고 위로하면서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떠나자 그제서야 어머니는 다리를 풀고 맥없이 쓰러진다.

다음 날 문 밖이 시끄럽다. 아이들이 대문간으로 돌을 던진다. 보아하니 커다란 황구렁이 한 마디가 아이 집으로 들어온다. 외할머니는 직감한다. 사돈댁 둘째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그는 구렁이를 빨치산 아들의 분신으로 보고 정성스레 제사상을 받들고 치성을 들여 이승의 한을 풀고 저승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자네 잘 가라고. 갈 길이 멀다'고 기원한다.

혼절했다 깨어난 할머니는 며느리를 불러 사돈댁을 청한다. 엄니, 어머니가 찾으세요. ( 앞선 엄니는 친정엄마고 뒤선 어머니는 시어머니다.) 이야기 전말을 들었다는 사돈댁은 고마움을 표하고 두 사람은 서로 손을 꼭 맞잡는다. 손주도 부른다. 나가 놀아도 된다고 아버지가 거든다.

갈등이 해소됐다. 장마는 그쳤다. 서쪽 하늘이 붉게 빛난다. 이것이 대략 살펴본 <장마>의 내용이다. 이념대결 보다는 화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할 만 하다.(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비록 빨치산의 잔인함은 보여주고 국군의 행동에는 그것이 빠져 있고 외할머니가 아이에게 친삼촌이 더 좋으냐, 외삼촌이 더 좋으냐고 묻고는 외삼촌이 더 좋지! 라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렇게 일방적이지는 않다.

당시 흔해빠진 반공영화와는 질적으로 차이를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명력 있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국가: 대한민국

감독: 유현목

출연: 황정순, 이대근

평점:

 

: 완장을 차고 경거망동하게 행동하는 이대근의 연기가 일품이다.(이후 이대근은 마당쇠의 의미로 다가왔다. 힘 좋은 그가 위통을 벗고 일을 할 때 안방의 마님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둘이 힘을 합쳐 또다른 땀을 흘린다 .)

경거망동이라고 했지만 그는 신념이 있는 산사람이다. 순진한 그를 누가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고통스럽게 했는지는 그 자신에게 묻기 보다는 우리의 아픈 현대사에게 물어야 한다.

구렁이라는 토속 신앙을 통해 갈등을 치유하고 마침내 화해하는 장면에서는 무당의 푸닥거리만큼이나 비현실적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총이 아니라도 생사람도 죽을 판이다.

서울서 대학다니다 내려온 사돈처녀와 산으로 들어가기전 사진도 챙겼던 빨치산 둘째아들의 정분이 좀 더 실감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아무 일이나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계곡에서 둘이서 목욕하다 무엇이 그리 급해서 서둘러 떠났는지.

잠시 후면 죽을 지도 모르는데 훗날을 기약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지 아니한가. 

창사구(창자) ,충그리다( 머뭇거리면서 웅크리다), 사분( 사돈) 등의 방언이 귀에 거슬리기보다는 친숙하다.

원작에서는 외할머니가 연두빛 완구콩을 까는데 영화에서는 붉은 강낭콩이다. 또 출연진들이 이름이 흰색이 아닌 붉은 색으로 칠해져 올라가는 것도 특색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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