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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우신예찬>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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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우신예찬> (1511)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12.2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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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은 찬양하기보다는 소홀히 여겨 깎아내리고 기리기보다는 덮어두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찬이라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고 사리에 어긋나니 슬기롭지 못하고 둔할 따름이다.

허나 이를 뒤집어 보면 비꼬고 조소하고 풍자했음을 너나없이 알 수 있어 어리석은 우신이 앞으로 펼칠 활약상이 눈에 선하다.

그 자신이 로테르담의 데시데라우스 에라스무스가 쓴 어리석음 예찬 연설이라고 밝힌 <우신예찬>은 남자의 신이 아닌 여신을 통해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교회와 그 무리들에 대한 통쾌한 주먹날림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어느 날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에 머물면서 친구인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의 집에 기숙하게 된다.

그 열흘 남짓한 기간에 그는 <우신예찬>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격언집>에는 이레 만에 그것도 여행 가방이 도착하지 않아 이렇다 할 참고할 서적이 없이.) 그는 호라티우스의 풍자시 ‘웃음으로 진실을 말하려는데 이걸 어떻게 막습니까?’,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막을 수 없어 “장난삼아” 집필하게 됐음을 서두에서 미리 알리고 있다.

이로써 독자들의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됐으니 책장을 넘길 때마다 웃을 일만 남았다. 친구에게 보내는 인사의 말이 끝나면 궤변가이기를 자처했던 연설가를 흉내 내는 본격적인 어리석은 신에 대한 예찬의 연설이 시작된다.

그에 앞서 우신은 자신이 부유의 신인 아비와 청춘의 요정인 어미 사이에서 귀족 여부를 판가름해 줄 떠도는 델도스 섬도 아니고 파도가 치는 바다도 아니고 속이 빈 동굴도 아닌 행복의 섬에서 태어났다고 출신지를 강조한다.

씨앗을 뿌리지 않아도, 밭을 갈지 않아도 모든 것이 풍족하고 고생할 일도 없고 늙지도 않고 따라서 병들지도 않는 경이로운 그 곳에서 그는 첫 생애를 우는 대신 어머니를 보고 웃음으로써 시작했다.

이런 나를 두 명의 아리따운 요정 즉 바쿠스의 딸 만취와 판의 딸 무지는 젖을 먹여 키웠다. 자아도취와 아부, 망각과 태만, 환락과 경솔을 몸종으로 두고 광란축제와 인사불성은 하인이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세상만사를 내 명령에 따르도록 했고 심지어 군주들도 내게 복종하도록 만들었으니 나 우신은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제잘 난 맛에 제멋대로 사는 철학자, 수도승, 사제, 교회학자, 주교, 군주, 교황 등을 마음 놓고 풍자할 수 있는 권한을 손에 쥐게 됐다.

겉으로는 짐짓 속마음을 버리고 쾌락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지만 대중들이 사라지고 나면 홀로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쾌락을 즐기는데 앞장서는 그들은 순진무구함을 무기로 어리석음의 독무대를 발산하는 우신 앞에서는 도마 위에서 바로 토막 날 비린내 나는 생선일 뿐이다.

진실을 두려워하는 군주는 아주 조금이라도 정직함을 잃으면 많은 사람들이 역병에 들 만큼 행사하는 권력이 크지만 그에 합당한 일 대신 백성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의 배를 채우는 색다른 방법에만 골몰하고 있다.

알랑거리며 비굴하고 하는 짓이 천박하지만 목에는 황금목걸이를 돼지처럼 걸고 이런 일이 질리지도 않은지 몇 백 년이라도 할 듯이 기세가 대단하다.

자줏빛 옷을 입고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만 정확히 자신의 직무를 행사하는 면죄부라는 거짓물건을 파는 주교들은 또 어떤가.

기독교인들로부터 무언가 이문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성직자들,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이득인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교회학자들(이들은 주일에 가난한 자의 신발을 고쳐주면 1천 명을 죽인 것보다 더 큰 죄라고 가르친다. 걸핏 하면 이단의 냄새가 난다며 마치 신탁을 받은 것처럼 교회전체를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한다.)과 보통 만나면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는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수도사들도 풍자의 물세례를 피할 수 없다.

 

자아도취에 빠져 대단하다고 여기며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맨 성자이므로 천국하나로는 자신들의 수고로움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고 떠벌이는 이들을 상상하는 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가.

아침은 매번 배터지게 먹으면서도 온갖 금식 일을 정해놓고 고해성사를 통해 비밀을 알아내고는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알도록 퍼트리는 고약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리를 사고, 사고 나서는 칼, 독약, 폭력으로 보존하면서 관직을 더럽히고 온갖 힘들 일은 팽개친 채 여가와 즐거움에 몰두하는 교황은 철야, 금욕, 눈물, 설교 강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흡사 무대의상과 같은 신비로운 옷을 차려 입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한가한 일이며 가난의 실천은 역겨운 것으로 치부한다. 죽는 것은 끔찍이 싫어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은 천부당만무당하고 여긴다.

십일조 뜯기에 혈안이 된 사제라고 해서 우신의 예찬을 피해갈 수 없다. 이들은 수익을 올리는 데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정도이니 이들은 ‘어리석은 자는 길을 걸으면서도 자각이 부족해 만나는 사람마다 바보라고 생각하고 어리석음에 있어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수치’라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천상에서는 예수님 옆자리 까지 소원하면서 물론 그 자리는 최대한 나중에 가기를 바라며 악착같이 매달리지만 도저히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현세의 쾌락을 누리다가 곧바로 천국의 쾌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자들”, ( 열린책들, 김남우 옮김, 2011) 정말 목불인견이 따로 없다.

한 마디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것만 같다’ 고 혹독하게 예찬했으니 힘깨나 쓰고 어깨나 세우는 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 책은 한 때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고 이를 비판하는 자들의 공격이 거셌다. 그래서 저자는 친절하게도 비판하는 자들에게 인사를 따로 드리는 수고로움을 보였다.

군주 앞에서도 바보나 광대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다는 이른바 바보들의 신성한 권리를 이용해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들을 맘껏 떠들어 댔던 것이다.

자유주의자이며 세계주의자로 16세기 유럽은 물론 5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실로 해학문학의 정수로 타락한 가톨릭의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외에도 <격언집>, <기독교 병사의 수첩>, <필립 대공을 칭송함> 등의 저서를 남겼다.

: 부록에서 에라스무스는 자신을 비판한 마르탱 반 도르프를 위대한 신학자로 추켜세우면서 실명을 들어 저들을 비판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만큼 저들의 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진다면 <우신예찬>은 신랄하기보다는 차라리 공정하며 겸손하고 점잖았을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나의 목적은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지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며 돕고자 했을 뿐 해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자신의 책은 쓴 약을 먹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약병 주둥이에 바른 꿀과 같은 것이며 왕이 광대를 궁정에 들인 것은 그들의 구애받지 않는 언행이 누군가의 잘못을 드러내고 마음 상하지 않고 쉽게 고쳐지도록 만드는 것과 같음을 설파했다.

그러면서 시의 적절한 농담은 흉악무도한 독재자까지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

제 아무리 지독한 독재자도 어릿광대들이 대중 앞에서 자신을 비판해도 관용을 베풀고 심지어 황제에게 변비 걸린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해도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오래전부터 용인된 사실을 들어 책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지적했다.

뻔뻔스런 주교, 사악한 교황, 저급한 교회 학자들에게 퍼부은 익살스런 농담에 펄쩍 뛸 이유가 하나도 없고 그렇다면 이는 인문정신에도 역행하는 짓으로 내 등 뒤에서 중얼거려도 개의치 않겠다고 점잖게 꾸짖고 있다.

우신의 어리석음은 세속의 지혜를 능가하기 때문이라는 것.

다른 부록에 실린 친구 안토니우스 룩셈부르크나 상트 베리탱 수도원장인 안톤 반 베르겐이나 암스테르담 작은 형제회 얀 빌에게 혹은 ‘막사발을 자랑하다’에서 쓴 내용도 이 책의 주제는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쓴 웃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호들갑떨지 말고 종교인의 이름에 걸 맞는 행동을 보이라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 가득한 교회 건물 가운데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얼마나 적은지 생각해 보라고.

이 모든 것은 부디 우신이 한 것이지 저자인 에라스무스가 한 것이 아니라고. 1512년 ‘최초의 개정판’에 이은 1522년 ‘저자가 직접 손을 본 최종본’에 이어 1532년 ‘저자가 재차 손을 본 최종본’ 등 겨우 일주일 걸려 쓴 책은 수 십 년에 걸쳐 개정에 개정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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