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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그들도 우리처럼(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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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그들도 우리처럼(1990)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11.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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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영화를 볼 때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모습의 배우를 보는 것이다. 한 때를 주름 잡았던 문성근이나 박중훈 혹은 심혜진의 생기발랄함은 내용과는 별개로 멋진 시간 여행의 동반자다.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세 배우는 현란한 연기를 펼치면서 ‘나도 한 때는 이랬었지’ 뽐내는 장면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어린다.

주름한 점 없는 문성근( 지난 정권에 가시가 박혀 무려 9년 동안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그도 많이 늙었다.)이나 거칠 것 없었던 박중훈(어디서 무엇 하는지,다른 곳 말고 영화에서 간혹 보고 싶다.) 그리고 한 미모 했던 심혜진( 인생의 영화 한편 남겨 주기를)은 서로 얽혀 있다.

보아하니 문성근은 먹물을 먹던 중 탄광촌으로 기어들어왔다. ( 자막 없는 영화초반 대학생 인 듯한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로 보아 그의 인생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이후 북소리에 맞춰 출연진들이 자막으로 호명된다. )

쫓기는 신분 인 것 같지만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흐른다.( 자신감 때문이겠지.)

폐광위기에 몰린 을씨년스러운 (더구나 계절은 겨울이다.) 강원도 어느 곳의 삭막한 분위기 속에 버스에서 한 남자가 내린다. 그리고 어렵게 직장을 구하는데 노동을 해보지 않았음에도 노동일에 매우 익숙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는데 크게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다른 노동자와는 달리 노동을 아주 즐겁게 대한다. (그 때 노동을 운동으로 하던 학생들은 대개 그랬다.)

심혜진은 거리의 여자다.(애처롭다) 긴 다리를 드러내고 아래서 부터 위로 스타킹을 신는 장면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올림머리( 그 유명한)를 하고 당시 유행하던 검은색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움직이는데 그 폼이 예사롭지 않다.

다방이니 커피니 티켓이니 하는 말로 보아 다방에서 근무하면서 차를 배달하고 또 티켓을 끊어 이런 저런 일도 가외로 하는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밝지 않다.)

박중훈은 표정이 살아있다. 낮술 때문인지 불콰한 얼굴로 큰 입을 여는데 나오는 말은 욕지기가 태반이다. ( 그것도 여성을 상대로. 많은 연습을 했는지 평소에도 자주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 그의 직책은 부사장이다.

아버지가 탄광의 사장이니 나이가 어려도 당연하다.( 지금도 그렇다.) 그가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다방 여자나 광부들)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대하는 것을 이해한다. 지역의 유지이면서 돈 줄을 쥐고 있으니 그런 힘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었다.

첫눈에 먹물을 좋게 보았는지 ‘오늘부터 영업부장’이라는 한마디로 직위를 수직 상승 시킨다.( 옆에 있던 과장은 속이 쓰린 표정을 짓지만 이후 그런 장면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그가 타고 다니는 것은 목소리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나는( 마후라에 여러 개 구멍을 뚫었나.)오토바이다.

탄 사람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헬멧을 쓰거나 머리카락이 날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맨머리로 달릴 때면 관객과 부사장이 하나가 된 듯이 절로 신이 난다. 먼지를 뿌리며 갱도가 있는 언덕길을 치고 올라 갈 때 세상은 남의 것이 아닌 그의 것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여인숙( 좁은 골목길 사이로 겨울의 눈처럼 빛나던 그 모습. 옛날 생각이 난다.)에 먹물과 여자가 함께 있다. 여자는 적극적이나 먹물은 그 반대다. 입었던 것과는 반대 순으로 스타킹을 벗어도 흥미가 없다. 노란 스웨터( 한 때 유행했었다.)마저 벗고 검은색 실루엣만 남았지만 먹물은 심드렁하다. (그래야지.)

‘노동 계급 地下 조직 적발’ 같은( 그 때는 국한문 혼용이었다.) 신문의 쪼가리 기사가 머리에서 맴도나 보다. 켜 논 텔레비전에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고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염려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마치 배경음처럼 들린다.

배후세력( 공안당국이 즐겨 썼던 표현이다.)을 색출해야 한다고 외칠 때는 도망가는 시위대를 따라잡는 경찰의 모습이 엇갈린다.

목욕탕에서 나와 무언가 할 준비를 다 마친 여자 앞에는 벌거벗고 기다리는 남자 대신 텅 빈 이불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먹물은 그것을 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가는 등 뒤로 야, 하고 불러 세우는 그녀의 목소리 들리지만 한 번 뒤돌아보기만 할 뿐 무시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당연하지.)

같이 일하는 꼬마는 아버지가 사우디로 돈 벌러 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노동운동을 주도 하다가 잡혀 감방에 있는 신세다.

이후 노조이야기가 자꾸 언급되고 파업이니 폐광이니 하는 말들이 사복형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심심찮게 들려온다. 바야흐로 노동자와 사업주가 크게 한 판 붙을 모양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부사장은 무관심하다. 오로지 술과 욕과 여자와 깽판만이 있을 뿐이다. 빌려간 돈을 원하는 날에 값지 못하면 아예 두 손을 마주잡고 빌어도 모른체하고 박살을 낸다. 그러다 지치면 오토바이를 타고 먼지를 뿌리며 마구 질주한다.

그가 도착한 폐허처럼 빈집으로 남아있는 곳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다. 둘은 신나게 하고자 했던 짓을 끝낸다. 일을 끝낸 부사장은 여운을 즐기는 대신 뒤끝이 안 좋은 행동을 한다.

열심히 받아 주었던 여자가 무언가 떨어트렸다고(어머니의 사진이 들어간 시계다.) 따귀를 불이 나게 갈긴다. ( 맞는 순간 얼마나 아픈지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존재했던 여자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장면이 바뀌면 사주의 대리인인 공장장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울상이다. 노조는 그 말은 지나가는 개도 믿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여자는 때리는 부사장대신 먹물에게 마음이 있다. 귀찮은 노인을( 이 노인 나중에 한 번 더 나오는데 수작질이 볼 만하다.)따돌리기 위해 여자는 남자에게 티켓을 끊어 달라고 부탁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 그런데 둘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지나치게 표준말을 쓴다. 남자가 먹물인 것은 앞서 밝혔으니 그렇다고 치고 여자는 왜. 예를 들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중이며 동생은 어려 부득이하게 휴학하고 돈벌이 나섰다는 추론은 해볼 수 있으나 근거는 없다. )

형사가 더 자주 등장한다. 꼬마에게 영치금 운운하는 이 형사는 사업주 아들에게는 깍듯이 대한다. 부사장과 먹물이 싸움이 붙었을 때 먹물만 연행한다. (나중에 먹물을 석방할 때는 부사장의 부탁이 있었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여자가 먹물을 찾아온다. 형( 당시는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를 이렇게 불렀다.)이 필요하다는 둥 뭐가 잘 못됐다는 둥 언제나 그렇듯이 희망에 비해 현실은 초라하다는 둥 투쟁방식이 이렇다는 둥 술잔을 앞에 놓고 진지하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 속이 잘 보이는 흰 잠옷을 입은 여자는 이리저리 방안을 배회한다. 그 때(다른 때도 아닌 바로 그 때) 심수봉( ‘그 때 그 사람’을 부른 바로 그 가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당시 여대생과 함께 있었다.)이 부르는 ‘무궁화’가 애잔한 목소리로 들려온다. (이 노래는 뒤에 나오는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와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파업이다. 횃불을 들고 구호를 외친다. 회사는 폐광으로 맞선다. 값싼 수입 산에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그 전에 먹물과 여자는 바다로 데이트 간다. 파도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회를 안주로 소주를 먹기도 한다. ‘여수 밤바다’가 아닌 동해 밤바다에서 서로 수작을 부리며 사랑을 키운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말한다. ( 상대방에게 가명이 아닌 본명을 알려주는 것은 의미가 심장하다. 남자도 나중에 진짜이름을 밝힌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밤새 앓는 아픈 남자를 간호해 준다.( 이런 모습 어디서 많이 봐왔지만 보기에 훈훈하다.)

부사장은 오늘도 때려 부순다. 이번에는 회사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달려 간 그는 계모에게 아버지의 여자일 뿐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배다른 여동생( 경리로 일하는)을 무시한 채 밖으로 나온다.

그가 갈 곳은 술집이고 할 짓은 행패이며 종착점은 싸움질이다.(뻔하다.) 경찰이 오고 먹물은 조서를 받고( 그 과정에서 잠깐 백골단에 쫒기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풀려나서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여자를 기다린다. (여자는 당연히 안 온다.)

여자는 짐을 꾸려 다방을 나오기 전 티켓을 끊은 부사장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가 떨어트린 칼로 찌른다. 기적 소리 울리자 꼬마의 배웅을 받는 남자는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난다는 듯이 작은 미련만 남겨두고 대합실을 떠난다.

국가: 한국

감독: 박광수

출연: 문성근,박중훈,심혜진

평점:

 

: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아 이런 식의 영화는 탄압받기 십상이다. 정면으로 부정한 정권에 맞선 것이 아닌데도 그런 분위기만 풍겨도 그랬던 살벌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월급도 제 때 주지 않는 악질 사업주에 대항해 힘겹게 살아가는 막장 인생은 어디에도 기댈 언덕이 없다.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하류인생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이 파업에 나섰을 때 무자비한 탄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최루탄이 터지고 시위자들이 쫒기고 얻어터지는 것은 서울 도심이나 강원도 산골이나 마찬가지다.

탄광으로 숨어든 대학생은 파업을 선동하지도 주동하지도 않지만 당시 양심 있는 먹물들이 가졌음직한 고뇌를 잘 표현하는데 적절한 장치로 활용됐다.

다방여자와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들과 대비 대는 망나니 사업주 아들의 천방지축 행보가 지난 시절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주 끊기는 어색함, 너무 친절한 설명, 허술한 얼개는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족으로 “ 이제 보니 넌, 똑똑한 년이구나.” 부사장 아들이 죽기 전에 여자를 향해 내뱉은 이 말, 왠일인지 여운이 길다. “우리들이 오늘을 뭐라 부르든 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는 마무리 멘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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