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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나그네는 길에서도...(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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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17.11.16  14: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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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손에 가방이 들려있다. 꽉 찬 것이 무언가 묵직해 보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유골함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아내의 것이니 사내( 김명곤)는 현재 홀아비 신세다. 그러니 행동이 자유롭다. 말 수도 별로 없고 걸음걸이도 빠를 게 없다. 나그네라고 불러도 좋을 듯싶다.

그는 제목과는 달리 길에서도 간혹 쉰다. 밥을 먹기 위해서 식당에 들르기도 하고 잠을 자기 위해 여관을 찾기도 한다.

<바보선언>(1983)으로 일약 대단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반열에 오른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사내가 아내의 유골함에 든 것을 처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길의 종착점은 버스가 멈춰선 강원도의 어느 해변이다. 어두워 질 무렵 그것을 뿌리기 위해 바닷가로 나간 사내에게 군대를 갔다 왔다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낮 익은 목소리의 짧고 강한 명령이 떨어진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관객들은 여기서 우리가 여전히 분단국가에서 산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는 가방을 들고 왔던 길로 되돌아선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의 사내들이 왁자지껄하다. 여관방을 잡고 고스톱을 치면서 끗발이 떨어지면 옆에 있는 갈보년( 영화 속 대사 그대로)과 다른 방에서 그 짓을 한다. (그러고 나면 떨어진 끗발이 살아난다는 믿음이 꾼들 사이에는 있나보다.)

무리에 사내도 끼어 있는데 그렇게 흥이 난 상태는 아니다.

그 전에 한 젊은 간호사(이보희)가 움직이지도, 말도 못하는 한 노인(회장님)을 돌보고 있다.

회사 소유의 병원이어서 간호제의를 거절 하면 그만둬야 하는 형편이라 간호사는 어쩔 수 없이 노인을 살피는데 단순 간호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은 회사와 계약을 했는데 그것은 특별해서 추운 겨울철 노인의 언 몸을 녹이는 핫백과 같은 일이 포함돼 있다.)

사내는 술잔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다. (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다. 이런 회상 장면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이어진다. 배경 음악은 판소리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김명곤은 <서편제> 서처럼 직접 부르지는 않는다.)

주인장은 사내에게 노인을 원하는 곳으로 모셔다 주면 10만원을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 곳은 민간인이 갈 수 없는 민통선 이북 지역이다. 노인의 고향이 아마도 그 쪽 인가 보다.

죽을 때가 돼서 그는 고향에 가보고 싶어 한다. (앞서 군인이 등장한 것처럼 분단 현실이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대목이다. 판소리 대신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가 나오기도 한다.)

화투판은 점점 달아오른다. 그 와중에 여자 한명이 느닷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죽는다. 경찰이 오기 전에 사내는 다시 길을 떠나고 각진 그랜저 한 대가 비포장도로를 달려 내려온다.

갑자기 행방불명된 노인과 간호사를 찾기 위해 서울서 급파된 회사 관계자들이다.

간부급으로 보이는 남자는 운전사를 마구 대한다. 부를 때 ‘이 자식’이나 ‘임 마’는 기본이고 나중에는 따귀까지 올려 부친다. (최근 크게 사회문제가 됐던 사장님이 운전사에게 부리는 갑 질과 비슷한 행태다. 뿌리가 이처럼 깊다.)

이들은 원통과 인제의 여관방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사내는 다시 술집에 앉아있다. 연탄난로의 기둥을 장갑 낀 손으로 잡고 있는데( 나도 이런 경험 많다. 그 때 그 기둥은 참으로 따듯했다.) 밖은 무척 춥다.

사방은 눈으로 가득하다. 여자는 말한다. 이 집은 숙박도 겸한다고. 마침 참한 색시도 있다고.

술과 잠에 곯아떨어진 사내 옆에 간호사가 있다. (사내는 자다가 이러 저러한 꿈속을 헤맨다.)

마침 오늘은 여편네(영화 속 표현) 3번째 기일이다. 다음날 사내는 어젯밤 여자를 찾지만 떠나고 없다. 서울에서 온 차는 구부정한 비포장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한다.

그 길의 한 귀퉁이에는 철조망이 쳐 있고 그 사이로 간첩신고나 민간인 출입금지 같은 붉은 딱지가 어지럽다.

곳곳에 눈발이 내리고 멀쩡하던 하늘이 잔뜩 먹구름이 낀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굿판이 신명나다. 무당은 나이 서른에 물가에서 관 셋을 짊어진 사내를 반드시 만나는데 그 사람이 전생에 네 남편이라고 중얼 거린다. 간호사 들으라는 소리다.

노인을 찾은 남자들은 떠나고 간호사와 사내만 남았다.

여자는 노인이 떠나기 전에 떨어뜨린 (늘 손에서 놓지 않았던) 낡은 흑백 사진을 보고 있다. 남쪽에서 자수성가했으면 이곳이 고향인 줄 알아야지 고집을 부리다 이번 겨울에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말거나 지나가는 소리로 들려준다.

둘은 점쟁이 말을 상기하면서 손금을 보기도 하고 나도 처녀였었던 적이 있었다면서 서로 시시덕거리며 즐겁다.

여자는 노인을 태우고 떠났던 남자에게서 퇴직금을 받았다면서 수표 한 장을 집어 든다. 거금 300만원은 아버지 방한 칸 마련해줄 큰돈이다. 여자는 찢으려다 끝내 그러지 못하고 흐느낀다.

아침에 일어난 사내는 온 통 눈으로 덮인 시골 집 지붕위에 유골을 뿌리고 마침내 강원도에 온 목적을 달성한다. 둘은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와 저 멀리서부터 걸어온다. 대화가 은근한 것이 부부로 살 작정인가 보다.

뱃고동 소리 나직이 울리고 무당의 굿판이 신명난다. 애들도 따라오고 무슨 잔칫날 분위기다. 물안개 헤치고 나룻배가 오고 사내는 사뿐하게 올라탄다. 여자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굿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되레 무당의 눈과 마주친다.

배는 출발하고 여자는 무당보다 더 흥이 났다. 접신한 여자는 정신없이 몸을 흔든다.

국가: 한국

감독: 이장호

출연: 김명곤, 이보희

평점:

: 흐름상 남자가 배를 타고 그 다음엔 여자가 뒤따라야 맞다. 그런데 여자는 반대로 굿판에 정신이 팔려 있다. (극적인 반전이다. 이러리라고 생각한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무당의 점괘와 상관없이 둘은 인연이 아니다.

전생은 그랬을지 몰라도 현생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이런 구도는 좀 몽환적인 느낌을 갖고 봐야 마음이 편하다.

중간 중간에 좀 끊기기도 하고 건너뛰면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듯이 보여도 그러려니 이해해야 한다. 이 영화는 관객들 편하게 보라고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관객이 감독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 이런 영화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해두자. 컷이 길어 자칫 지루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면 영화의 생명력이 짧았을지 모른다. 길게 늘어지는 것이 단점이 아닌 장점인 것이다.

분단과 아픔, 샤머니즘과 현실, 남성과 여성이 절묘하게 얽혀 보는 내내 눈을 떼기 어렵다.

이제하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했다. 술 먹고 담배 피는 장면이 지겹도록 화면을 채운다. 앉았다하면 술잔이고 잡았다하면 담배다. 화면을 접고 나면 냅다 강원도 어디엔가 있을 물치로 내려가 회를 안주로 소주 한 잔 먹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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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bgusp@news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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