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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19 18:50 (화)
266. 하얀전쟁(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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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하얀전쟁(1992)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11.0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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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왔다고 치자. 그 후의 내 삶은 현실과 타협할 수 있을까. 적당히 그렇게 세월아~ 잊혀 져라, 그 땐 그랬었지! 남의 일처럼 말하면서 정의에 굴복하던 자신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할까.

동료의 목을 비틀다 진창에 팍 쓰러져 죄의 바람에 몸을 말리고 나면 나는 여전히 잔인한 인간은 잊고 허물 벗은 뱀처럼 새롭게 태어나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정지영 감독이 만든 <하얀전쟁(White Badge)>의 변진수 일병(이경영)은 아닐 수 있다는 가정 쪽에 섰다.

스스로는 그럴 수 없었던 그는 한기주 병장(안성기)의 손에 죽어서야 비로소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깨끗이 잊고 소대원들이 있는 이 세상이 아닌 저세상으로 갔다.

이것은 소설이고 ( 안정효 원작)그래서 허구이고 영화 속 이야기지만 여전히 살아서 꿈틀 거리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일부분이다.

적을 죽이고 민간인을 쏘고 집을 파괴하고 건물을 무너뜨리고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월남 파병 전투병들도 그렇게 다른 전쟁처럼 똑같은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잡지에 파병 소설을 쓰는 한 병장은 어느 날 변일병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그가 부쳐온 권총 한 자루를 손에 쥔다. 베트남에서 적을 죽이던 바로 그 총이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병장에게 총은 기억에서 떨쳐 버리려던 그 곳 베트남의 정글 속을 다시 헤매게 만든다.

월남의 두 달 동안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어떤 전쟁영화는 초반부터 피와 살이 터진다. 목이 잘린 잔혹한 장면도 등장하지만 <하얀전쟁>의 초반은 붉은 색은 아니다.) 너무 심심해 전쟁하러 왔지, 삽질하러 왔나 하는 게으름도 부려보고 고국에서 온 편지도 읽고 김문기 하사(독고영재)의 여동생과 펜팔 대상자를 고르느라 야단법석을 부리기도 한다.

전쟁대신 평화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 평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평화는 단지 전쟁을 위한 과정인 것을 나도 알고 관객들도 안다.

아련하게 헬기 소리 들린다.( 헬기의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는 모든 전쟁영화에서 아주 긴요한 음악적 효과를 낸다. 월남전에 나오는 헬기는 대개 UH-1H(일명 휴이)나 치누크로 불리는 CH 47이다.1980년 광주에서 계엄군이 기총 소사를 했다고 의심받고 있는 바로 그 기종이다. 문을 열고 M60을 양각대로 거치한 후 조준 사격할 수 있다. )

다다다, 다다다다! 하는 거친 디젤엔진이 멀리서 들리다가 가까이 다가오고 다시 멀어질 때 이곳은 평화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광기가 서린 전쟁터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그 소리 요란하다. 헬기가 뜨고 내릴 때 병사들은 즐겁고 또 괴롭고 살아 있다가 죽었다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서울의 어느 곳에 전역한 민간인 신분의 한병장이 들어선다. 신문사다. 더는 못쓰겠다고 친구인 담당기자에게 하소연 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추어내는 작업이 힘겨웠는데 변진수 일병까지 등장하니 그도 더는 견디기 괴롭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아마도 전쟁의 경험 때문에 한병장도 아내와 불화하고 있나보다. 아이와 잠깐 만나 부자의 정을 나누지만 곧 검은색 자가용이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보아 이혼을 했거나 별거 중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혼 사유중 하나는 그의 성적 무능력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후에 나오는 술집여자와의 잠자리에서 그는 제대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해 자존심 상한 여자에게 핀잔을 듣는다. )

하지만 고료는 선불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독자들의 반응도 좋다. 무엇보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써야 한다.

그는 잠시 영화 포스터를 본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을 맡아 열연한 <디어헌터(1978)> (의약뉴스 이 코너 133번째로 다뤘으니 참고해도 된다.) 장면이다.

역시 월남전이 배경이다.( 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권총을 머리에 대고 하는 포로들의 러시안 룰렛 게임이다.) 한병장의 머리는 더욱 혼란스럽다.

장면이 바뀌면 이번에는 단칸방에 변일병과 김하사의 여동생 사라( 심혜진)가 있다. (보아하니 둘은 결혼 했다기보다는 동거생활 중인 것 같다. 그녀는 예사롭지 않은 얼굴과 옷차림이다. 안타까운 듯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밥은 이불안에 있고 나, 오늘 못 들어 온다’ 고 말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사라는 미군부대서 춤추는 댄서다.)

다시 월남의 정글로 화면은 빠른 속도로 바뀐다. 비가 온다. 판초우의를 쓴 잠복 근무 중이던 병사들은 M16( 흔히 식스틴으로 불렸다.)을 앞에 놓고 불안과 초조한 기색이다.

전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일제히 사격이다. 콩(베트콩) 을 잡기 위해 요란한 콩 볶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M60( 기관총이다. 성능이 식스틴에 비해 월등하다.)이 불을 뿜는다. 수류탄도 터진다. 하지만 잘려나간 것은 적대신 소떼의 몸체다.

다음날 주민들은 항의한다. 항의하는 그들을 보고 분명 우리가 잘못했으니 물어줘야 한다는 말도 들리고 싸우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맞서는 장면도 나온다.(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먹혀들지 않자 주민들은 허탈해 하고 아이들은 주먹질을 하면서 엿 먹으라는 시늉을 한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미군을 따라 다니다가 빈 깡통을 던져주면 아이들이 '퍽 큐'를 외쳤던 그 때가 그렇게 오래전의 일은 아니다.

질펀한 술자리. 오가는 대화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콩까이( 베트남 여자)재미는 봤는지, 돈은 벌었는지, 어떤 수훈을 세웠는지 그렇고 그런 얘기들이다.

한병장은 생각한다. “내가 거기서 지켜야 했던 것은 월남의 자유와 평화가 아니라 쥐새끼보다 초라한 내 목숨이 아니었던가. 내가 거기서 얻은 것은 인간과 역사의 가치에 대한 혼돈뿐이다.” ( 전쟁을 보는 감독의 시각이 확연히 드러난다.)

입대를 피한 친구는 월남전을 이용해 큰돈을 벌었다. 그는 심란한 한병장에게 “박통 때문에 돈을 번 것이 그렇게 잘못됐냐”고 소리친다.( 영화 초반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하에게 총 맞아 죽는 순간에 대한 라디오 방송이 들렸다. 그러니 술집 장면은 그가 죽은 후 신군부가 등장해 계엄령을 발동했던 시기로 보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월남의 그 날처럼 비가 억수로 퍼붓는다. 변일병이 거기에 신문지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 둘은 재회한다. 그러기를 몇 차례. 변일병은 월남전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정글 속에서 전투를 벌인다.

한병장은 권총을 든다. 그리고 커다란 십자가가 달려 있는 성당의 인파 앞에서 이름을 불러 돌려세운 후 변일병의 왼쪽 가슴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여자 팬티를 입고 기어이 살아서 돌아온 변일병은 적의 손이 아닌 아군의 손에 그것도 적지가 아닌 평지에서 죽는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월남에서 죽은 조상병을 찾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한기주는 쓰러진 변일병의 옆에 누워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고 좋은 소설을 써야 겠다고 다짐한다.( 영화는 여기까지다. 그는 다짐처럼 좋은 소설을 쓸 것이다. 감독은 물론 관객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월남전의 악몽이 변일병을 처치함으로써 사라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 죄를 말린다. 그 땐 정말 대단했었던 그곳,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이렇게 끝났다.

국가: 한국

감독: 정지영

출연: 안성기, 이경영, 독고영재, 심혜진

평점:

 

: 눈뜨고 보기 어려운 무서운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잠복과 수색에 익숙해 질 무렵, 그러니까 파병 6개월이 지나서 마침내 살집은 사방으로 솟구친다.

일명 두더지 작전의 전과로 적의 그것을 자르고 자른 것을 담아 보여주는 장면에서 노련한 한병장도 심한 구역질을 느낀다. 민간인의 등을 단검으로 여러 차례 마구 찌르는 장면도 나온다. 심지어 동료를 마구잡이로 살해 한다. 살육의 정점이다.

그런 현장에 대한뉴스를 보내기 위해 서울에서 온 기자는 지친 소대원들을 모아 놓고 연출방송을 한다. 집단 최면에 걸려 한번 체험해 보고 싶었던 허영이었다. 그 전쟁은.

하지만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소대원이 거의 전멸한 현장에 투 스타가 예의 그 다 다다다! 하는 헬기를 타고 현장에 온다. 배가 나왔고 손에는 지휘봉이 들려있다.

그는 느릿느릿한 걸음을 걸으며 '이번 작전은 유인전술로 적의 주력부대를 막기 위해 소대원들을 일부러 적지에 몰아넣은 것'이었다고 실토한다.

부대원들이 다 죽었다고 눈물짓는 생존자에게 그는 ‘그게 전쟁이다’ 라고 말한다. 장군은 헬기를 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원작자인 안정효는 현재 소설은 물론 번역가로 맹활약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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