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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김 약국의 딸들(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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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김 약국의 딸들(1963)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10.2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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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독실한 신자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이 신자는 늘 신을 마음에 품고 살았으며 몸소 그런 행동을 남이 보지 않아도 실천해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겉으로만 신자인 가짜와 다른 진짜 신자였다.

남의 아픔을 비웃지 않고 내일처럼 같이 아파했으며 때로는 상처 입은 사람을 위해 마음뿐만 아니라 성금을 내놓는 등 실제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섬기는 신은 이런 신자를 굽어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자에게 참으로 큰 불행이 찾아 왔다. 그는 뒷수습을 마치고 텅 빈 집으로 돌아와 신을 대신한 형상들과 물건들과 그것들을 위해 준비한 진심어린 사물을 한 동안 쳐다봤다.

그는 처음으로 신을 부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닥치는 대로 그것들을 부수고 발로 밟고 깨트렸다. 그리고 신은 애초에 없다고 울부짖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다시 같은 신을 모시는 신자가 됐다.

신을 부정했지만 그렇다고 상실했던 소중한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마음도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믿는 신은 그 전에 그가 의지했던 신과는 어쩐지 거리가 있었다. 유현목 감독의 <김 약국의 딸 들>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딸들의 어머니( 황정순)는 마을 앞에 있는 오래된 고목을 신으로 섬겼다. 오다가다 만나면 늘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모아 신령님께 빌었다.

새끼줄을 둘렀으며 짚으로 만든 인간형상을 걸어 놓고 머리를 조아렸다. 행실도 나쁘지 않아 그가 믿는 신은 그가 바라는 가족의 안녕과 부귀영화를 위해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훼방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태껏 빌었건만 딸들에게는 물론 집안에도 비극적인 일들이 계속해서 닥친다.

그는 빌던 손을 거둬들이고 미친 듯이 신인 거목을 저주한다. 시커먼 섞어 빠진 것, 썩 물러가라, 줄을 뜯고 짚을 던진다. 그러다 다시 돌아와서 어떤 갑작스런 충격으로 잠시 정신이 나갔던 사람이 그것이 돌아온 것처럼 살려 달라고 미천 한 자의 실수라고 용서를 빈다.

앞선 자와 뒤선 자의 그것이 다르지 않는 것은 믿음과 부정과 다시 믿음이라는 인간의 동일한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어떤 운명이나 팔자 같은 것, 말하자면 피할 수 없는 그 어떤 초자연적인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제목에 약국이 등장하지만 약국을 연상하는 것은 한약장이 초반에 한 번 비치는 것 말고는 없다. 약을 파는 장면도 잘 보이지 않고 약을 사러 그 집에 오는 손님도 그렇다. (새로운 약이 들어와 한약만으로는 신통한 재미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약장사는 거의 접은 상태이다.) 다만 딸들이 지나가거나 어디서건 만나면 김 약국 집 딸 이라는 말을 통해 영화의 제목을 상기 시킬 뿐이다.

경남 통영의 지주에게는 딸이 여럿 있다. 첫 째 딸(이민자)은 일찍 상처해 혼자 산다. 친정에 호의적이지 않다. 혼자된 그에게 가장 절실한 물질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는 일수놀이를 하면서 억척어멈으로 변신하지만 음욕을 이기지 못해 의사와 놀아나고 영아를 살해한 살인자 신세다.

셋째 (최지희)는 딸 들 중 가장 제멋대로다. 머슴 한 돌(황해)과 놀아난다. 애욕의 화신이다.아편쟁이 남편(허장강)을 두고 있는데 사내구실을 못하니 젊은 몸은 감당하기 어렵다.

이런 낌새를 챈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겁탈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데 성공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머슴이지만 제대로 그것을 하는 한 돌이 나타나고 둘은 밀린 회포를 풀기에 정신이 없다.

하지는 못해도 하는 부인을 감시하는 촉은 누구보다도 밝은 아편쟁이가 꼭 그런 때는 나타나 남편이라고 구실을 해내려고 한다. 그 구실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살인이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날이 잘 벼린 도끼다.

그는 그것을 들고 나무대신 머슴의 등짝을 찍고 말리던 장모마저 그렇게 한다. ( 이 때 천둥이치고 번개가 일면서 비는 억수로 내리 붓는다. 그렇잖아도 놀란 관객들은 엄청나게 큰 소리에 더 놀라게 된다. 이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배치되는데 가장 사실감 있으며 '걸작 <오발탄> (1961)을 만든 그 유현목 영화가 맞아 하는 의문은 과연 유현목이다' 라는 인정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도끼 춤을 추는 허장강의 연기가 시쳇말로 리얼하다. )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일은 머슴이 늙은이의 손에 죽는 일이다. 머슴하면 힘이 장사고 그래서 주인집 딸이 좋아했는데 그것도 못하는 정신나간 이의  도끼에 맞아 죽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랬으면 어땠을 까. 몇차례 늙은이의 공격을 막아낸 그가 도끼를 뺏어 정부의 남편을 죽이고 겁에 질린 장모에게 아씨를 번쩍 쳐들어 올리고는 '이제 따님은 내 것 이구만유', 하고서는 씩 웃었다면.

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가 어찌 상놈이 양반집 딸과 잠시 정분을 나누는 것은 몰라도 대놓고 그 짓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설정을 하기도 했으니.)

 

둘째( 엄앵란)는 유일하게 점잔을 빼는 요조숙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오는데 서울서 만나는 남자가 있으나 그와 맺어 지지 않고( 그는 남자를 나이브하다고 비판한다. 나이브란 영어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어색하다기 보다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와 엮인다. (원작자가 토지의 작가 박경리다. 배경은 일제 시대. 좋은 어장은 왜놈이 다 가져가 잡을 고기가 없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일제는 농지뿐만 아니라 바다까지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

또 다른 딸은 뱃일을 돌봐 주던 어장 관리인 기두(박노식)과 결혼한다. 하지만 그 역시 아내를 사랑하거나 기울어 가는 집안의 기둥역할을 제대로 해내지는 못한다. 나중에 해피 앤딩의 장면에서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영화가 끝난 후에는 그러기로 작정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과정은 비극이지만 결말은 희망차다. ( 이는 원작과는 다른 설정이다.) 딸만 여럿 있는 한 가족의 쇠락이 가슴을 저민다. 나라도 잃고 가족은 만신창이가 되고 뱃일도 시원치 않은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그 시절의 애잔한 풍경이 통영 바닷가를 배경으로 고스란히 녹아 있다.

국가: 한국

감독: 유현목

출연: 엄앵란, 최지희, 박노식,허장강

평점:

 

영화 초반에 결혼한 남의 부인을 처녀 적에 사모했던 갓 쓴 남자가 찾아와 말을 트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사냥이 직업인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뒤 쫒아 가서 죽이는데 초반부터 섬뜩한 살인 장면이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부인은 비상을 먹고 죽었고 이후 비상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다거나 비상 먹고 죽은 자손은 피 말라 죽는다는 말은 비극이 되풀이 될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말이 됐다.

이후 18년이 지나고 나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얼개를 그려 나간다. 정욕에 못이기는 김 약국의 딸과 그들과 연관된 남자들이 벌이는 말 그대로 사투가 시대의 우울함에 얹혀 브레이크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 그 아버지 되는 사람 역시 부인을 놔두고 기생집을 들락날락 하면서 외도를 꿈꾸는데 이는 양념이라기보다는 영화를 관통하는 일관된 어긋남이며 이 어긋남은 여지없이 비극과 연결된다. 아버지는 심각한 병에 걸려 영화가 끝나면 곧 죽을 운명이다.)

출연진 가운데 온전한 인물은 어머니와 셋째,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는 남자와 사촌오빠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운명을 바꿔보기 위해 푸닥거리를 하고 서양여자가 등장해 구원을 이야기 하는 장면 등 너무 많은 것을 한 꺼번에 보여주고 싶은 욕심 때문에 영화는 전반적으로 산만한 느낌이 든다.)

영화의 배경이 된 통영은 지금 관객들의 발길이 잦다. 주인공들이 오르내렸던 언덕길( 서피랑)은 가득 찬 벽화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먼 바다는 양식장으로 활기를 띈다.

통영에 가면 도끼 맞아 죽은 머슴의 넋과 그런 짓을 한 자의 흔들렸던 영혼, 그리고 죽은 자를 애타게 찾는 정신이 돈 음녀를 위로해주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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