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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민족시인 이상화와 대구 근대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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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민족시인 이상화와 대구 근대골목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08.18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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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근대골목 나들이는 하루를 기분 좋게 한다.

오래된 건물이 주는 세월의 흔적과 선조들의 숨결을 피부로 느끼며 걷는 길은 미소가 절로 입가에 머문다.

한눈에 띄는 계산성당과 제일교회를 보고 즐비한 한약방 거리를 지나면 여행객의 마음은 들뜨기 마련이다.

그러다 이상화 고택에 발길이 머물면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 한수가 맴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구절은 일제의 만행과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한 삶을 살아온 한 시인의 생애를 그리워 하게 만든다.

칼날 앞에 맞선 독립투사의 심장은 얼마나 뜨겁고 단단하기에 비겁하지 않게 버텨냈을까.

1940년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변절했다. 가망없는 해방에 대한 체념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하지만 끝까지 남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 이상화가 되겠다.

붉은 석류가 열린 이상화 고택으로 여행객들이 들어온다. 그리고 위대한 한 시인의 생애와 식민지 시대를 되돌아본다. 

이상화 생가 옆에는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던 서상돈 민족운동가의 고택도 있다.

그리고 또 그 옆에는 마천루처럼 높이 솟은 아파트가 내려다보고 있다. 좀 떨어져서 지었으면 하는 바람도 잠시 1999년 도시개발로 고택마저 헐린 위기에서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구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사진을 찍고 여행객이 떠나자 고택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쌓였다. 마루에 홀로 걸터앉아 식민지 시대, 한 시인의 고뇌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그렇게 했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또 그렇게 했다.

시인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불과 43세의 나이로 1943년 병사했다. ( 같은 날 동향인 그의 오랜 친구인 '빈처'의 작가 현진건도 사망했다.)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시인의 집을 나와 청라언덕으로 향한다. 1900년대 선교사들이 살았던 고택 주변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버티고 섰다. 운치가 넘쳐난다.( 근처에 동산의료원이 있다.주변 환경이 좋아 환자들이 빨리 완치할 것 같다.)

언덕을 내려가면 그 유명한 서문시장이다. 시간이 나면 들러 보고 그렇지 않으면 택시를 타고 김광석 거리를 여행하는 것도 괜찮다.

의미 있는 노래를 부르다 1996년 31세로 요절한 김광석이 이상화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면 어땠을지 궁금하다.

‘일어나’, ‘서른 즈음에’ 등의 노래를 듣다 지치면 인근의 방천시장에서 곱창과 소주 한 잔으로 시장기를 달래며 '참 살기 좋은 세상이 왔다'고 한마디 해보자.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다.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이 활짝 그것을 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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