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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창의문과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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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17.08.08  15: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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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이나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창의문은 인조반정과 연관이 있다.

이곳에 모인 일단의 반란군들이 1623년 3월 광해군을 몰아 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반란이 일어 난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도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다 왕권을 이복 동생에게 뻿겼다.

반란의 이유는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형제를 살해했다는 것. 이른바 '폐모살제'를 문제 삼은 것인데 사실은 권력에서 밀려난 서인들의 주동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인조)은 직접 군사를 몰고 이 곳에서 진을 치다 사전 약조에 따라 훈련대장 이흥립의 저항을 받지 않고 어렵지 않게 반란에 성공했다.

쫒겨난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그 곳에서 죽었다. 후대 사가들에 따르면 천인공로할 폭군으로 연관군과 함께 거론되는 광해군의 업적이 적지 않다.

이미 기울어진 명나라에 기댄 중화사상의 신봉자들인 이항복의 제자인 서인들에 의해 물러 났지만 외교를 통한 조선의 실리는 높이 평가 할 만하다는 것.

이 밖에도 왜란으로 지친 백성들의 세금을 깎아주고 토지개혁을 실시하기도 했다.

보물 제 1881호인 창의문은 그래서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천장에는 암수 봉황이 희롱하는 장면이 있는데 인왕산을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궁궐에 나쁜액을 막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지네의 천적은 닭인데 닭대신 봉황을 그려 넣었나 보다.)

현재 보고 있는 창의문은 1741년(영조 17년)에 세웠으며 1958년 보수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소문 중 유일하게 남아 역사의 현장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창의문을 통하면 서울성곽길을 오를 수 있다.

사족: 인조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선정을 베풀고 국가를 더욱 발전시켰을까. 다 알다시피 인조는 무능한 왕이었다.

이미 쇠한 명과 친하고 흥하던 금을 배척했던 이른바 친명배금 정책은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졌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조선을 정벌했다.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숨어 목숨을 부지하다 더는 못 버티고 무릎을 꿇고 청에 항복했다.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앞세우고 청황제 앞에 세번 절을 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던 것이다.

군신의 예를 다한다는 조건으로 인조는 살아 남았으나 조선왕은 역사에 유례없는 굴욕을 당했고 국운은 쇠퇴 일로를 걸었다.

인조반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광해군이 계속 정권을 유지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분명 달라 졌을 것이라는 부질없은 가정을 해보는 것은 인조의 무능과 참모들의 간신행위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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