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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대위의 딸>(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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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대위의 딸>(1833)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04.0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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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뿌시킨은 낡은 액자 속의 인물이었다. 아마도 꽃이었을 것으로 기억되는 가로의 그림 액자 속에 세로로 길게 시가 이어졌는데 나는 아무런 이해도 없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 라는 구절을 외웠다.

다른 시들은 외웠다가 금방 잊혀졌지만 이 시는 의미도 제대로 알 지 못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외우고 있다.

뿌시킨의 이 시는 간혹 가는 이웃 마을의 동네 이발소나 5일장을 따라 나서 운 좋으면 들르게 되는 읍내 중국집의 지저분한 방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시 외에 산문에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한 번 읽어 봐야지 여러 번 작정을 했지만 지금까지 그러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삶이 그대를 속이는 일들이 일어났고 나는 불현듯 뿌시킨 찾았다.

뿌시킨이 남긴 유일한 장편 소설 < 대위의 딸>을 집어 들고는 마침내 이렇게 읽게 되는구나 하는 들뜬 기분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읽기도 전에 기분 좋은 흔치 않은 경험에 나는 미리부터 오싹한 소름을 느꼈다.

 

등장인물이 성으로 불리다가 이름이나 직책으로 불리는 등 누가 누구 인지 헛갈리는 프나 스키 등으로 끝나도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읽는 내내 흡족한 기분을 배가 시켜 주었다.

그러니 헤매지 않고 아주 순탄하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길이도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긴 중편 정도의 분량이어서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1772년 일어난 뿌카쵸프의 반란과 눈 덮인 우랄강과 볼가지방의 끝없이 이어진 숲을 연상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어머니의 배속에 있을 때부터 연대의 중사였던 가난한 귀족 출신 그리뇨프는 16섯 살이 되자 부성애라고는 거의 없는 아버지의 등쌀에 밀려 군대에 들어간다.

가는 도중 잠시 머물던 여인숙 집에서 스스로 기병연대 대위라고 칭하는 이반 주린과 술을 먹고 곤드레가 되고 내기 당구를 쳐서 돈을 잃기도 하는 등 주인공은 그야말로 부모의 품을 벗어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와 동행하는 영리한 늙은 하인 사벨리치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귀족 도련님을 어르고 달래지만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그의 앞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여행은 저녁이 오고 눈보라가 쳐도 계속된다. 임지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멀기 때문이다. 쉬어가자는 사벨리치의 말을 무시한 그리뇨프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눈 보라 속에서 마차와 함께 길을 잃고만다.

사방은 깜깜하고 바람은 살아 있는 짐승처럼 날뛰는데 어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그들은 마치 정해진 시나리오처럼 어둠속에서 길손을 만나고 농부인 그의 안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빈털터리인 농부는 그리뇨프에게 술 한 잔 먹고 싶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본 그리뇨프는 그가 마흔 정도의 나이에 어깨는 딱 벌어지고 검은 턱수염에 새치가 듬성듬성 보이는 대단한 용모의 사나이인 것을 간파했다.

그리뇨프는 우리 까자크인들은 차 같은 것은 안마시니 술 한자만 사달라고 간청하는 농부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다음날 사벨리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뇨프는 자신의 토끼털 가죽잠바를 벗어 농부에게 준다. 옷을 너무 얇게 입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농부는 옷이 작아 실밥이 터져도 아랑곳 않고 몸속에 꾸겨 넣으며 마침내 즐거운 웃음을 터트린다.

농부와 헤어진 후 어렵게 벨로그로스크 요새에 도착한 그리뇨프는 미로노프 대위의 지휘를 받으면서 초급장교로 군대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병영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흐르고  요새라는 곳도 이름만 그럴 뿐 제대로 된 방책도 마련되지 않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언제 수리 했는지 모를 대포는 녹슬어 있고 병사들의 사기는 늙은 사령관의 구호에 맞춰 겨우 복창하는 정도다.

그곳에는 그리뇨프보다 먼저 배속된 쉬바브린이 있었는데 그는 살인죄로 쫓겨 벌써 5년째 이 곳 생활을 하고 있다.

마음씨 좋은 신부 부부도 있고 당연히 대위의 딸인 마샤도 있다. 그녀는 18살 정도로 혼기가 꽉 찼는데 동그스름한 얼굴은 혈색이 좋고 금발머리는 귀 뒤로 넘겼는데 두 귀는 발그스름했다.

그리뇨프가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그녀도 그에게 관심이 있다. 그런데 마샤는 쉬바브린이 오래전부터 자신의 부인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마샤는 쉬바브린을 싫어해 그의 청혼을 거절해 두 사람 사이는 냉랭한 상태다.

요새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숙소 창밖의 풍경은 그지없이 한가롭다. 그리뇨프는 장기를 살려 시를 쓰고 좋은 평을 듣고 싶어 쉬바브린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혹평한다. 사랑에 성공하고 싶다면 시 나부랭이나 가지고 수작부리는 대신 귀고리라도 선물해야 저녁에 어둠을 틈타 마샤가 찾아온다고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리뇨프는 그 말에 분노를 느껴 결투를 신청한다. 두 번째 결투에서 그리뇨프는 큰 부상을 입는다. 

그는 마샤의 헌신적인 치료로 5일 간의 혼수상태를 이겨내고 회복된다. (뿌시킨 자신은 연적 단테스와 결투로 사망한다. 단테스는 뿌시킨이 나탈리야와 결혼하기 전에도 그녀에게 흑심을 품었다.

나탈리야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한 단테스는 뿌시킨이  나탈리야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에게 덤볐고 이에 뿌시킨은 결투로 맞섰다.

부인 나탈리야는 황제도 탐낸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하니 단테스라는 자의 집요함이 이해할만도 하다. 한편 뿌시킨이 죽은 후에도 단테스는 파리의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했고  나탈리야도 장군과 재혼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즈음 반란군들은 있으나 마나한 요새를 침공한다. 요새는 방어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점령당한다. 반란군들은 사령관인 대위 부부와 장교들을 지체 없이 처형한다.

그리뇨프 역시 죽을 위기에 처한다. 약싹 빠른 쉬바브린은 반란군의 편에 섰다. 그런데 쫓겨난 뾰뜨르 3세( 에카테리나 2세 황제의 남편, 부인에 의해 제거된 뒤 살해당했다.)를 참칭하는 뿌가쵸프라는 자는 구면인 것 같은 인상이다.

살펴보니 하인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그가 토끼털 외투를 줬던 바로 그 농부다. 그리뇨프는 이런 인연으로 겨우 목숨을 살린다. 방안에 숨은 마샤와 함께 떠나지는 못한다.

반란군들은 기세등등하고 여제 폐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서 방어하자는 정부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인근 지역의 요새를 차례로 무너뜨린다. 모스크바로 진격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지만 뿌가쵸프의 운명은 거기까지 였다. 그는 여제를 위한 황제군의 합동작전에 체포돼 처형당한다. 마샤는 어떻게 됐느냐고.

그리뇨프의 청을 받은 뿌가쵸프는 안전하게 마샤를 쉬바브린으로부터 지켜준다. 해피앤딩이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뿌가쵸프의 반란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그렸는데 참혹한 전쟁의 이야기 대신 아름다운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기억되는 것은 천재 시인 뿌시킨의 재능 덕분이다.

앞에서 언급한 시는 이렇게 끝난다.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그의 말대로 우울하고 슬픈 현재를 견디니 기쁨의 날이 온 것이다.

: 작품 곳곳에 유머 코드가 가득하다. 그리뇨프를 시종 일관 따라 다니는 늙은 하인 샤벨리치는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지혜를 가감 없이 전달한다.

연적 쉬바브린의 배신과 변절 행위도 약방의 감초처럼 기가 막히다. 반란자 뿌가쵸프는 야만과 아량을 동시에 보여준다. 무자비한 반란자이기도 하고 은혜를 갚는 선량한 군주의 양면을 갖고 있다.

마샤는 아름다운 사랑의 승리자가 돼 영원히 뿌시킨의 가슴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마샤가 그리뇨프와 함께 행복해 지는 것은 두 사람만의 의기투합 때문만은 아니다. 뿌카쵸프의 관용외에도 영국산 하얀개와 함께 있던 중년 여인이 없었다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이트 갭을 쓰고 통통하고 혈색 좋은 40대 중년 부인으로 ( 반란군의 두목 뿌가쵸프도 40대로 나온다. 그의 인상 평도 그녀만큼이나 넉넉하다. 이것은 황제와 반란자를 비슷한 위치에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위엄과 평온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마샤는 그녀에게 그리뇨프가 반란군의 편에 서서 뿌가쵸프와 화기애애하게 어울려 다녔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을 하소연한다.

이후의 상황은 일사천리다. 이 대목은 마치 착하게 살았더니 백마 탄 어린왕자가 나타났다는 것과 유사하다. 반란을 중심축으로 사랑이 이어지나 피 튀기는 살벌한 장면은 스쳐 지나가듯이 가볍게 처리된다.

전쟁의 참화나 무자비한 폭동이나 반란의 살벌함 등은 세세하게 그려지지 않고 있다. 사령관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부인의 시체가 그 다음날에도 널부러저 있다는 표현 정도가 잔혹한 대목이다.

죽고 죽이는 장면은 부는 바람 정도로 가볍게 스케치 됐다. 또 하나는 반란군을 잔혹한 악당으로 묘사하지 않고 정부군을 선량한 우군으로만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의 검열 상황을 짐작해보면 이는 뿌시킨의 용감한 행동과 치밀하게 계획된 글쓰기의 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 발행인의 이름을 빌려 사건을 마무한 장면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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