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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밤으로의 긴 여로>(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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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밤으로의 긴 여로>(1956)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01.1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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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이 <밤으로의 긴 여로>의 원고를 완성( 1939년 집필 시작)했을 때 그는 세 번째 부인인 배우 출신 칼로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은 후 25년 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로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부인은 그가 53년 사망( 그는 호텔방에서 죽었는데 죽을 때 ‘젠장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에서 죽는군’ 이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했을 때 그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사후 3년이 되던 1953년 작품을 발표하고 스톡홀름 왕립극장에서 초연을 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네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노벨상은 이미 1936년에 수상했다.)

칼로타에 따르면 그는 이 작품을 쓰면서 “들어갈 때보다 십년은 늙은 듯 한 수척한 모습으로, 때로는 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은 채로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다”( 민음사, 2002, 민승남 옮김)고 술회했다.

이런 사전지식을 알고 나서 읽으면 왜 그랬는지, 작가의 고뇌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작가의 이야기, 실제로 작가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된 희곡은 서문에 “사랑하는 당신,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바친다”고 할 만큼 구구절절하다.

출연 배우는 딱 네 명이다. 간혹 하녀나 부동산 중개업자, 의사, 창녀 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아주 미미하다.

작가는 아버지 티론과 큰아들 제이미는 극중에서 그대로 쓰고 어머니의 이름을 엘라에서 메리로 그리고 두 살 때 홍역으로 죽은 둘째 에드먼드와 셋째 유진의 이름을 바꾸고 나머지는 실제로 오닐 가족을 옮겨 놓았다.

그러니 작품을 쓰는 내내 작가는 서로 쥐어뜯었던 가족들의 실제 생활이 눈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막이 오르면 1912년 8월의 어느 아침, 아버지인 제임스 티론의 여름 별장(유일하게 가족을 위해 장만한 집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티론이 순 싸구려로 지어 집 같은 아늑함이 없다고 불평이다.)에 네 식구가 막 식사를 끝낸 참이다.

응접실로 통하는 거실에는 셰익스피어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발자크, 졸라, 스탕달의 소설과 쇼펜하우어와 니체, 마르크스, 엥겔스 등의 철학서와 사회학 서적 입센, 버나드 쇼의 희곡, 오스카와일드, 키플링 등의 시집이 꽂혀 있는 작은 책장이 있다.

이들이 무지막지한 노동꾼이 아닌 어느 정도 배운 먹물 가족임을 나타내 준다. (유리를 끼운 대형 책장에는 뒤마, 빅토르 위고, 세계문학전집, 흄의 영국사와 로마 제국 흥망사 등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이 책들을 모두 읽었다는 흔적이 있다는 점이다. )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65살의 티론은 한 때 셰익스피어 역을 맡은 정도로 연기로 인정을 받았으나 돈 때문에 전문배우 대신 흥행배우의 길을 걷다 은퇴했다.

아일랜드의 이민자답게 술을 엄청 좋아해서 거의 중독 수준이고 돈이 생기면 가족에게 투자하는 대신 땅을 사 모아( 돈이 없어 요양원에서 죽을 것을 겁내고 있다.) 노랑이라고 가족들에게 멸시를 받고 있다.

결혼생활 35년째를 맞고 있는 54살의 어머니 메리는 마약쟁이다. 19살 때 그러니까 수도원 여학교를 다닐 때 티론의 잘 생긴 얼굴과 배우 역에 빠져 수녀가 되는 대신 그와 결혼을 택했다.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면서(순회공연을 따라 다녔다.) 막내 에드먼드를 낳을 때 진통제 중독이 된 이후 맨 정신이 아니다. 특히 손가락이 길고 끝으로 갈수록 가는 아름다운 손을 계속해서 떨고 있다.

33살인 큰 아들 제이미는 아버지를 닮아 어깨가 넓고 가슴이 탄탄한데 활력이 없어 노화의 흔적을 얼굴에 달고 있다. 집구석을 특히 아버지를 비난하면서 술로 허송세월한다. 매사 부정적이지만 동생 에드먼드에 대한 작은 우애는 간직하고 있다.

23살인 막내 에드먼드는 기자로 활동했고 지역 신문에 때때로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너무 말랐고 뺨이 푹 꺼져 있어 병색이 완연하다.

가족들은 여름 감기라고 하지만 모두 그가 폐병에 걸려 있고 심약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자, 등장인물들의 면모가 조금이기는 하지만 밝혀졌으니 이들이 저녁까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지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가족들은 어머니의 마약 중독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에드먼드가 위험한 상황임을 의식한다.

그래서 형제는 특히 큰 아들은 어머니나 동생을 돈을 들여 좋은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아버지는 그럴 때 마다 주치의인 하디 의사가 돈 만 밝히는 시내의 다른 의사보다 실력이 낫다고 우기지만 비싸지만 않다면 의사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다.

2막이 시작되면 식전에 하녀는 소화를 돕기 위한 위스키를 내온다. 에드먼드와 제이미는 아버지 몰래 한 잔 가득 위스키를 마신다.

언제나 술의 양을 정확히 아는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그 만큼의 물을 붓는다. 술을 먹으면서 형제는 서로 비웃고 의심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부모 흉을 본다.

메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본다. 제이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 다른 사람들 약점이나 찾고,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정한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

그 날 오후 아버지는 시내로 나가는 아들에게 1달러가 아니라 10달러를 준다.

두 아들은 모처럼 큰돈을 들고 실컷 술을 마시고 제이미는 뚱보 창녀와 재미를 본다. 늦은 저녁 에드먼드와 티론은 메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걱정을 하거나 탓하면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제이미를 기다린다.

메리는 약기운을 틈타 자신이 낮에 하녀에게 티론과 첫사랑을 회상했다는 것을 꿈속에서 이야기 하듯이 전한다. 초점 없는 눈으로 손가락을 떨고 있는 메리는 누가 봐도 바로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다.

4막이 시작되면 자정이다. 티론과 에드먼드는 카드놀이를 하지만 카드에는 안중이 없고 서로 비난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술을 먹을 때는 서로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늙은 광대, 삼류 배우의 신세한탄을 한다.

에드먼드는 티론에게 피차 솔직해 지자면서 시를 암송하고 티론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제이미에게 그 건달 놈 막차를 놓쳐 시내에서 돌아오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악담을 한다.

에드먼드는 술과 폐병으로 죽은 다우슨의 시를 외면서 자신을 그에 견주기도 한다. 돈 때문에 어머니 치료를 하지 않고 자신을 싸구려 요양소를 보내는 아버지라고 면전에서 대들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지독하게 가난했던 그래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었던 그 때를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구두쇠 짓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 때 곤죽으로 취한 제이미가 들어온다. 잤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저버리고 메리도 2층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약기운에 비틀대면서 뻣뻣한 솜씨로 피아노를 친다. 삼부자는 술에, 메리는 마약에 흥청망청 취해 있다.

: 티론 가족은 위태롭다. 금방 난파할 것 같은 목선처럼 흔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 뱉는 말은 상대방의 공격을 유도하고 상대방이 응수하지 않으면 더 센 말로 자극한다.

서로 물고 뜯고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왜 같이 사는지 한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고 한 지붕아래에서 모여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서로를 불신하고 의심하고 조롱하고 무시하고 하찮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적대감만이 전부였다면 이 가족의 삶은 4막까지 그러니까 그 날 자정까지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 으르렁 대면서도 가족에 대한 안타까운 말하자면 핏줄에 대한 실 낫 같은 애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증오에 앞서 사랑이라는 이름이 밤안개처럼 피어나고 있다. 싸우기 위한 대화는 불신과 감시 대신 신뢰와 안심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말꼬리 잡기 식의 대화는 어느 새 공감대가 형성되고 적대감 대신 이해의 마음이 드러난다. 돌지 않기 위해 용서와 화해, 이해가 따라 다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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