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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중경삼림(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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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중경삼림(1994)
  • 의약뉴스
  • 승인 2016.10.1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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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운 영화를 보자고 했다. 단순하면서도 골머리 섞지 않는 그런 영화 말이다.

복잡하고 긴 영화에 한동안 머리에 쥐가 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가 있을까. 거기다 작품성까지 있는 영화가 어디 흔할까. 흔하지 않을 진 몰라도 있었다.

틀어 논 라디오에서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이 나왔다. 마마스 앤 파마스가 부른 이 노래가 나오는 영화가 바로 <중경삼림>이었다.

왕가위 감독 작품으로 홍콩하면 떠오르는 그런 영화 였는데 목록을 살펴보니 아직 정리하지 않았다. 왕 감독의 대표작은 <중경삼림>이 아니고 <화양연화>(2000)라고 여러 사람이 말할지라도 <중경삼림>에는 그만한 매력이 있다.

해서 옷장을 열고 쌓아놓은 DVD를 유심히 살폈다. 왕가위 컬렉션 안에 들어 있는 <중경삼림>을 꺼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약 중개업자 임청하와 사복경찰 금성무가 스쳐 지나가는 첫 장면은 여전히 기가 막혔다. (끝 부분에 남녀 주인공 네 명이 첫 장면처럼 스쳐 지나가는 앤딩 신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초점이 잘 맞지 않은 흐릿한 빠른 화면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치 남처럼 엇 비켜 가는데 관객들은 알지만 두 남녀는 서로 만날 때 자신들이 거리의 인파속에서 안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지만 항상 어깨를 부딪치면서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연이라면 금성무처럼 정확히 57시간 후에 임청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경찰 넘버 223번으로 불리는 그에게는 메이라는 사귀는 여자가 있다. 하지만 헤어졌다. 업무 중에 틈틈이 그는 메이를 찾는 전화를 걸지만 메이는 이름만 남긴 채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는 스포츠머리의 젊고 단단한 남자에게 금발의 미인이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청춘남녀가 할 일 가운데 사랑 말고 다른 어떤 게 더 소중할 수 있을까. 범인을 잡고 마약을 팔아 돈을 버는 것보다 모양새가 날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꿀릴 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두 사람의 직업은 하필 경찰이고 하필 마약상이다. 감독은 하필 두 사람의 직업을 이렇게 설정했을까, 누구와 닮지 않았다는 시답잖은 이유로 차일 만큼 금성무가 허접하게 생긴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고 따질 겨를도 없이 영화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간다.

일이 끝나고 가게 앞에서 기다리는 일이 없어졌으니 실연의 아픔을 딛기 위해서라도 몸속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달릴 수밖에 없다.

앞으로 그에게는 메이 부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몰래 발코니로 살금살금 내겨가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가 틈나면 들르는 가게에는 차인 메이 대신 또 다른 메이가 있다.

주인은 메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보라고 하지만 경찰 넘버 223은 오늘은 선약이 있다고 거절한다. 그 즈음 노란 가발을 쓴 임청하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감춰진 눈 대신에 드러난 다른 얼굴들은 피곤에 절어 보인다.

밤새 잠 못 자고 마약 팔러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얀 담배가 물려 있고 노란색 레인코드 아래의 긴 다리는 매우 선정적이다.

100달러짜리 돈을 수북하게 가지고 있어도 그녀는 어딘지 가슴 한 구석이 펑 뚫려 있는 것처럼 웃음기가 없다. 사랑하는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대신 조명이 화려한 술집에서 담배 먹고 마약하는 것에서 어떤 기쁨이 있을까.

가게에는 새로운 여 종업원이 왔다. 선머슴처럼 머리가 짧은데 몸은 운동하는 여자처럼 좋다. 손님 받기 보다는 음악을 들으면서 길고 가는 허리를 돌리는 것에 흥미있다.

금성무가 떠난 자리에는 정복경찰 양조위가 맡는다. 어깨에는 무전기를 달고 멋진 모자를 쓰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모름지기 정복경찰은 이래야 한다. 사복경찰이 과학수사를 한다면 정복경찰은 시민을 편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여튼 경찰 넘버 633번인 양조위도 차였다. 이런 남자를 차는 여자는 어떤 여자인지 보고 싶지만 화면에는 끝날 무렵에 스치듯이 나온다. 직업은 스튜어디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는 작년 이맘때 5000피트 상공에서 그녀를 유혹했고 성공했다.)

차인 남자는 모두 가련하다. 그런 신세를 면키 위해서는 새로운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가게 종업원 왕페이가 양조위의 옆구리를 차지한다.

터질 듯한 가슴과 끊어질 듯한 허리를 흔들어 대면 천하의 양조위라고 해도 곁눈질 하지 않을 수 없다. 편지 한 장 주고 떠난 여인은 이제 잊는 게 정석이다.

일 나가고 없는 빈집에 그녀가 들어간다. 옛 여인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체취를 남기고 돌아오는 왕페이의 일상은 흥미롭다.

두 사람이 언제 부딪히느냐는 일만 남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면서 그 옆에 붙어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쳐다 보거나 그런 남자를 숨어서 내려다보는 여자의 애틋함은 사랑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말해준다. (언젠가 홍콩에 갔을 때 그들이 타고 올라가도 내려왔던 그 에스컬레이터를 직접 타봤다. 뭐, 실감 같은 건 없었다. 심성이 메마른 나이로 접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텅 빈 집에 들어온 양조위는 누군가 지나간 흔적을 아직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모형 비행기를 가지고 논다. 연료를 가득 채운 비행기처럼 오래갈 줄 알았던 그들 사이는 벌써 금이 갔다. 비행기는 항로를 변경했고 좌석은 취소됐다.

그는 달리는 대신 그녀가 남기고 간 왠지 슬퍼 보이는 물건들과 대화한다. 위안의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상처 입은 남자들은 어떻게든 치유해 보겠다고 발버둥이다.
국가: 홍콩
출연: 양조위 임청하 금성무 왕페이

평점:

: 만우절 날 헤어진 남자라면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농담이라면 한 달 정도로 끝날 일이다. 그 날 이후 매일 5월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산다.

30개의 통조림을 다 샀어도 만날 수 없다면 사랑의 유통기한은 끝이다. 남자는 결국 30개의 통조림을 다 먹어치우는 운명이다.

슬픔에 젖은 남자는 같이 울어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지만 퇴짜를 맞고 홀로 지하 술집으로 들어간다. 그 때 0.1센티미터의 거리를 두고 스쳐 지나갔던 금발의 그녀가 들어온다.

이미 처음으로 술집에 들어오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겠다고 다짐했던 그였으니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5년간 사귄 여자와 헤어진 남자를 위로해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만신창이인 그녀는 쉬고 싶다. 그녀는 아침에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이힐을 신은 채로. 남자는 생각한다. 엄마가 말했었지. 신발을 벗지 않고 자면 다음날 발이 분다고. 그는 그녀의 작은 발에서 굽이 높은 신발을 벗겨준다.

그는 또 생각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깨끗한 구두가 어울린고. 자신의 빨간 넥타이로 흰 구두를 닦는 남자.

밖은 천둥이 치고 구름이 빠르다. 쏟아지는 빗속을 질주하는 남자. 버리려고 했던 삐삐에서 신호음이 울리고 생일 축하한다는 여자의 메시지가 뜬다.

그는 위로 받았을까.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유통기한은 영영 끝나지 않을까. 메시지를 남긴 그녀는 목 넘김이 좋은 맥주 필리핀산 산미구엘 간판이 어울리는 술집에서 남자의 등에 네 발의 권총을 발사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제복입은 경찰이 실연의 아픔을 딛고 사랑했던 가게의 선머슴 같은 왕페이는 캘리포니아 같은 곳의 날씨가 궁금해 그를 떠났다.

하필 그녀는 비행기에서 서빙 하는 스튜어디스다. 경찰넘버 633은 그녀가 그려준 비에 젖은 비행기 티켓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새로운 여자도 떠났다. 아, 여자는 떠나는 존재인가.

사족: 여자가 선글라스를 쓰는 것은 앞이 안 보이거나 변장을 하기 위해서거나 실연당해서 울다가 부은 눈을 감추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 번도 벗은 적이 없는 임청하는 앞선 세 가지 이유와는 다르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쓴 이유는 관객도 모르고 아마도 감독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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