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19 11:48 (금)
21.<백경> (1851)
상태바
21.<백경> (1851)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6.09.26 17: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51년 발표된 H.멜빌의 <백경>(원제: 영국에서는 The white Whale 미국에서는 Moby Dick)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이 처럼 단순한 소설도 있을까 싶다.

분량은 제법 길어 작심하고 읽어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두껍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머리는 크게 쓰지 않아도 된다. 쉬운 내용이기 때문이다.

읽지 않은 사람들도 다 <백경>의 내용은 알고 있다. 백경을 잡으려는 복수심에 불타는 늙은 선장과 잡히지 않으려는 거대하고 잔인하고 약아 빠지기 까지 한 백경이 벌이는 사투라는 것은. 그래서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단순한 고래 이야기라는 정도로 치부됐다.

하지만 거기에 심오한 인간의 심리가 내포돼 있다는 평가가 잇따르면서 오늘날에는 불멸의 고전 명작 반열에 오르고 있다. 두어 번 읽다가 그만 두고 한 20여년 만에 다시 읽으려니 감회가 새롭다.

결론을 알고 있어도 문장에 숨은 속뜻을 파헤치니 특이한 작가의 넓은 정신세계가 성난 파도처럼 불어 닥쳤다.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의 망망대해서 일엽편주 하나로 자신보다 더 큰 백경과 맞서 싸우는 선장 에이햅의 집념은 광기 바로 그 자체다.

 

백경에 의해 다리 하나를 잘렸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복수의 근거이지만 그 보다는 어떤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기어코 깨부수겠다는 일념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포경업은 미국에서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었다.

고래기름은 여러모로 유용했고 값도 비싸 한 번 출항에 3년 이상이 걸려도 갔다 오면 생활이 보장됐다. 힘든 뱃일이 기다리고 있지만 선원들을 구하는 것은 그래서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주인공인 나 이슈멜은 뱃사람이다. 그가 에이햅의 배 피쿼드 호에 승선하는 장면은 그럴듯하다. 주머니는 텅 비고 육지에는 흥미를 끌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홀연히 배를 타고 세계를 다녀오기에 적합하다. 우울한 마음도 털어 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에도 좋다.

거기다 지금은 마음속에 축축한 11월의 가랑비가 내리고 자신도 모르게 장례행렬의 뒤를 좇아 갈 때 느끼는 우울함까지 있지 않은가. 그것을 털어 버리기 위해서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한다. 배는 공짜다. 돈까지 벌 수 있다.

선원이니 배의 뒤가 아닌 맨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처음 맞는 기분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나 이슈멜은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원시의 해안에 상륙하기를 좋아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기 까지 한다.

공포에도 민감하며 할 수 만 있다면 그것과 깊이 사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친해지고 싶다.

이것이 이슈멜이 배에 오르는 이유다. 배에 오르기 전 나는 식인종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의 두개골을 마치 양파처럼 끈에 매달아서 들고 다니면서 파는 문신투성이 이교도인 작살잡이 퀴퀘그를 만나 그의 복잡한 세계 속으로 빠져 들기도 하고 그가 세속의 신이 아닌 마음속의 신을 믿는 모습에 감탄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피쿼드 호의 승선 계획은 포경선에 투자한 세 명의 선주에 의해 착실히 진행되고 배는 드디어 출항의 닻을 올리고 미국의 낸터킷 항을 떠나 고래잡이에 나선다.

아직 에이햅 선장은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가 언제 나올지 호기심을 가득품고 기대하지만 좀처럼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등장하지 않아도 그가 선장실에서 무슨 꿍꿍이를 하는지 선원들은 늘 귀를 기울인다. 

책의 1/3정도를 읽어야 드디어 그가 갑판에 모습을 드러낸다. (책의 끄트머리에서 결판이 나지만 결국 에이햅은 백경의 눈을 작살로 작살낸다. 그리고 그 역시 백경을 따라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비극적으로 위대한 생애는 이렇게 마무리 되면서 더 이상 넘길 책장이 없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게 된다. 멜빌은 에이햅의 생애를 비극적으로 위대한 생애라고 결론 내리고 모든 인간의 위대함은 병적인 것이라며 젊고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피쿼드 호의 1등 항해사는 스타벅이다. 낸터킷 출신으로 육체의 군살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데 그것은 병마나 근심걱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때문이었고 이등 항해사 스터브는 겁쟁이도 용사도 아닌 그냥 그냥 살아가는 태평가이며 고래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3등 항해사는 플라스크다.

이들 고급선원과 30여명의 하급선원이 피쿼드 호에 승선했다. 이들이 할 일은 고래를 잡아 머리를 자르고 기름을 짜고 통에 담고 남아 있는 통이 가득차면 만선을 자축하며 그리운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항구로 돌아오는 일이다. 그 일이 무려 3년이 걸린다.

3년 동안 이들은 망루에서 물 뿜는 고래를 발견하고 보트를 내려 추격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고 잡은 고래를 배로 끌어 올려 피범벅이 된 고래를 해체한다. 새끼와 망망대해에서 놀고 헤엄치고 장난하던 고래들은 이렇게 피쿼드 호의 선원들에 의해 가차 없는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보이는 모든 고래를 다 잡는 것은 아니다. 참고래는 추격하지만 기름 값이 싼 고래들은 보고도 모른 척 한다. 그 중에서 말향고래는 에이햅 선장은 물론 모든 선원들이 좋아하는 고래라 보는 족족 잡아들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됐지만 선장은 마지막으로 백경을 잡아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있다.

이것은 그가 배에 오른 이유이며 목적이다. 죽음의 눈앞에서도 에이햅은 백경의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선원들에 의해 최고의 수령이며 독재자로 불리는 그는 말향고래의 턱뼈를 갈아서 만든 상아빛 한쪽 다리를 절며 일본열도 근처에서 3일 밤낮 백경을 추격한다. 선장도 죽고 선원들도 다 죽고 배도 가라앉고 백경도 죽었다.

운명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멸망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른다. 나 이슈멜만이 살아남아 이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 1등 항해사 스타벅이 커피를 즐겨 마신다고 누군가에서 들었다. 그래서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의 이름이 유래됐다고 했다. 그럴 듯했다. 그래서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스타벅이 등장할 때마다 그가 언제 커피를 마시는지 예의 주시했다.

그러나 책의 어디에서도 스타벅은 단 한 모금의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술도 마시지 않는다. 선원들이 술을 먹는 분위기는 언급되지만 부각되지 않는다.)책의 전체를 통해서도 커피 이야기는 두 어번 정도 나오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마시면서 맛을 음미하거나 인생의 고뇌나 죽은 고래에 대한 애도나 에이햅에 대한 적개심이나 이런 것이 아니다. 바다에서 만난 독일선원이 들고 있는 기름통을 커피 주전자라고 오해하는 것 정도다.

그리고 두 번째 커피가 나오는 대목은 책의 2/3분의 읽었을 때인데 3등 항해사 플라스크의 모습을 에이햅이 관찰하면서 저 놈은 마치 망가진 커피 가는 기계 같은 목소리로 중얼 거린다고 독백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책을 덮을 때 까지 그 어디에서도 커피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죽음의 순간 혹은 백경을 잡고 나서 피보다 더 진한 커피를 먹는 장면을 기대했고 단말마처럼 내 뱉는 커피 맛에 대한 표현이 어떨까 고대했는데 물거품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서 내가 잘못 들은 것으로 판단하고 스타벅스의 이름의 유래에 대해 찾아보니 스타벅(Starbuck)의 이름에서 스타벅스가 정해진 것은 맞았다. (애초에는 스타벅 대신 배의 이름인 피쿼드(Pequod)로 하려고 했다나.)

어쨌든 스타벅은 커피를 좋아하지도 먹지도 않는다. 피쿼드 호의 선장인 에이햅과 고급선원은 물론 30여명의 선원 그 누구도 <백경>에서는 커피를 먹지 않는다.

사실 내가 <백경>을 굳이 급하게 읽었던 것은 이 사실을 빠르고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족: 허먼 멜빌은 <주홍글자>의 저자 “ 너새니얼 호손에게 그의 천재성에 대한 나의 찬양의 표시로 이 책을 바친다” 고 썼다.

그만큼 호손을 모범으로 <백경>을 저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책 중간 중간에 극의 대사체 문구를 볼 수 있다. 고래의 생태와 포경업에 대한 이해가 백과사전 보다 더 정교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