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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방인>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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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방인> (1942)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6.06.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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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잘 못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마치 진실인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면 낭패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만해도 그렇다. 분명히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가 죽은 날 창녀와 동침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누군가 <이방인>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당연히 화제로 올렸다.

이게 말이 되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말이 되지 않는다고 동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한 오류다. 그는 창녀가 아닌 전에 같이 일했던 직장동료 타이피스트 마리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이다.

잠을 잔 것은 맞지만 그 대상은 창녀가 아니었고 날짜도 장례식 당일 날이 아닌 그 다음날이다.( 창녀인가 아는 여자 친구인가는 확실히 다르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마리가 아니고 창녀였다면 뫼르소는 더 부도덕한 인물로 해석될 것이다. 그 반대 일수도 있지만.)

두 번째는 살인을 한 이후 작품이 마무리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살인은 2부로 이루어진 이 책의 1부가 끝난 것에 불과하다. 세상에, 과연 전에 책을 읽었었는지 조차 의문이 들게 만드는 두 번째 기억상실은 아무리 변병해도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재판과정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데 주인공이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기를 바랐던 대목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무슨 부조리한 기억인가.

왜 그런 잘못된 기억이 입력됐는지 그것은 책을 읽은 시간이 하도 오래됐기 때문이라고 자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찾을 수 없다. 허무맹랑한 기억을 마치 사실인양 떠벌였으니 서로는 각자에게 무엇으로 보상 받을 수 있는가.

세 번째는 태양 때문에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앞서 두 가지 내용은 명백히 잘못된 기억이지만 이 세 번째는 얼추 들어맞는 것이어서 그래도 읽기는 읽었구나, 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간략한 내용 정도는 들었구나 하는 위안을 삼고 있다.

누군가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내가 이런 기억으로 끼어들었던 것 같은 기억을 내세운 것은 여전히 <이방인>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 것 같다고 한 것은 이것 역시 정확히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릇된 이야기를 누군가 바로 잡아 주지 않았던 것 역시 지극히 부조리한데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배려 때문은 아니었을까. 겨우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방인>이 생경스럽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음사, 김화영 옮김, 2011) 너무 나도 유명한 이 책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엄마의 죽음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명확하게 사실 관계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 중의 하나 일 것이다. ( 나의 기억 잘못 역시 주인공처럼 기억의 혼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위안에 위안을 더할 수밖에.)

엄마가 죽었으니 같이 살지는 않더라도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나 프랑스의 점령지 알제나 다를 바 없다. 참석할 이유가 없다면 전보를 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전보를 받았으니 주인공인 나 뫼르소는 장례식장이 열리는 알제에서 80킬로미터나 떨어진 양로원이 있는 마랭고로 가야한다.

2시에 버스를 타면 당일 오후에 도착할 수 있고 그러면 내일 저녁에는 돌아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장에게 2틀 간의 휴가를 신청한다. 이유가 이유이니 만큼 거절 할 수 없는 휴가신청인데 사장은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고 변명하는 수밖에 없다. 가는 길은 지치고 힘들지만 마침내 양로원에 도착하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하지만 울음이 나오기는커녕 마음속에서도 큰 슬픔은 밀려오지 않는다. 양로원 원장이나 엄마의 친구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심지어 엄마의 시신조차 보지 않겠다고 하고 시신 옆에서 문지기와 담배까지 나눠 피우고 고인에 대한 예를 다하면서 날 밤을 새우는 대신 졸기까지 한다.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해 연세가 많았느냐고 물으면 그저 네 라고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쯤 읽다보면 뫼르소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이 간다. 효성이라고는 거의 없고 자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대체로 맞아 떨어진다. 이후의 뫼르소 행동은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장례식 다음 날 마리와 동침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살인을 한다.

살인의 과정은 치밀한 준비에 의한 계획된 범행은 아니다. 그것은 우발적인 것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이 뺨이 타는 듯이 뜨거운 햇볕 때문이었다. 단도를 들고 대드는 아랍계 청년에게 방아쇠를 당겼고 이 후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더 쏘았다.

뫼르소가 체포 되는 과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2부에서는 재판장의 모습과 재판과정 그리고 검사의 심문에 응하는 뫼르소의 시니컬한 대응장면이 나오고 최종적으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

변호사의 충고도 무시하고 대는 데로 대답하는 바람에 그는 정당방위로 풀려 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린다. (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의 점령지 사람을 죽인 것이므로 재판정은 뫼르소에게 일부러 불리하게 재판을 하지 않았을 텐데 사형선고까지 받은 것은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은 것과 재판과정에서 보인 무성의한 처신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루한 재판 과정을 거쳐 감방에 갇히고 사형 집행의 날을 하루 앞두고 <이방인>은 끝난다. 그러니 사형은 작품 밖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전 전 그는 이렇게 홀로 중얼 거린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 엄마의 죽음에 이어 홀로 사는 노인과 같이 사는 늙은 개의 죽음, 그리고 살인에 이르기 까지 죽음은 시종일관 <이방인>을 따라 다닌다. 각각의 죽음은 서로 다르다.

그 죽음을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도 다르다. 실제 느끼는 감정과 겉으로 드러내는 행동과의 괴리도 있다. 당연하다. 사는 것에, 승진에 그리고 죽는 것에 큰 관심이 없으니 아무래도 좋다. 장례식 다음날 여자와 희극영화를 보고 동침을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여자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결혼에는 승낙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사회의 관습이나 전통적인 가치라고 여겨지는 것, 혹은 종교적 신념이나 경외까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니 죽음 직전 신부가 찾아오자 역정을 내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다.

뉘우치거나 잘못을 빌거나 개과천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는 마땅히 이런 인간은 부적응자로 낙인찍고 영원히 격리한다. <이방인>에 대한 분석은 무수히 많다. 번역자의 책에는 본문보다도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 해석이 실려 있다.

어느 독자가 <이방인>을 각색해 보겠다는 제의에 대한 카뮈의 답장 '<이방인>에 대한 편지'부터 1955년에 쓴 저자의 미국판 서문 그리고 1992년에 쓴 로제 키요의 이방인 50주년 기념논문 ‘<이방인>을 다시 읽는다’ 와 옮긴이의 작품해설 등이 길고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방인>을 읽는 시간보다 <이방인>에 대한 이런 저런 평을 읽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으니 끝까지 읽어보면 기억의 상실을 오랜 시간 더 연장 할 수 있다. 그것은 ‘작품해설’이 갖는 장점이다.

참고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인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교와 대비되는 이민족이나 이교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과 차별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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