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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비브르 사 비(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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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비브르 사 비(1962)
  • 의약뉴스
  • 승인 2016.05.2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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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에 그 배우가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생전 처음 보는 배우라 해도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감독과 배우가 찰떡궁합이기에 가능하겠다 싶다. ( 실제로 감독인 장 뤽 고다르와 여 주인공 나나역의 안나 카리나는 한동안 부부로 살았다.)

그러니 감독은 배우를, 배우는 감독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생기를 얻는 첫 번째 조건은 충족된 셈이다. 이 영화는 11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85분의 비교적 짧은 상영기간 동안 장면을 구분하는 컷이 많다보니 지루하기 보다는 쉽게 동화된다. 따로 노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전 장면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주는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앞뒤를 서로 연결하는데 문제가 없다. 어렵지도 않다. 그저 차분하게 앉아서 오랜만에 흑백이 주는 묘한 분위기를 감상하면 된다.

처음에 나나는 자신의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출연진 자막이 오르는 동안에는 줄 곳 흐릿한 옆모습만 보여주다가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면 의자에 앉은 뒷모습만 화면앞으로 당겨져 있다.

성질 급한 관객들은 나나의 희뿌연 하거나 반쪽이 아닌 전체 얼굴을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얼굴은 대체 어느 정도 일까 하는 호기심은 그녀의 입은 옷과 짧게 자른 생머리가 파리지엔의 선두에 있다 해도 전혀 이상 할 게 없다는 자연스런 느낌 때문이다.

하지만 생긴 뒤태와는 달리 나나의 대화는 시덥지않다.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타령을 늘어놓는다. 남편인지 남친인지 기둥서방인지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 남자 폴( 안드레 s. 드바르프)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잔인하다거나 우울하다거나 끔찍하다거나 죽고 싶다거나 하는 말들이 오고가는데 카페 종업원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

좀 더 진행되면 나나는 가게 종업원인 것 같고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으며 앞으로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 돈을 빌려 달라고 하고 그런 돈이 없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나나는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고 남자도 별 볼일 없는 사내다.

나나는 담배를 피는데 그것도 줄담배인데 어느 순간 두 개의 콧구멍에서 두 줄기의 흰 연기가 똑바로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어, 언제 얼굴이 보여 졌지? 하면서 나나의 정면 얼굴을 보게 된다.

예상대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여간내기가 아니다. 깊고 둥근 얼굴, 오뚝한 콧날, 야무진 입술은 나나가 허름한 카페에서 보잘 것 없는 사내에게 허튼 소리나 하고 앉아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레코드 가게에서 나나는 2000프랑을 꿔 달라고 동료 종업원에게 말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숱이 많은 검은 생머리도 숨기지 못한 드러난 귀가 잘 못 들었나 내가? 하는 듯이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는데 개선문 근처의 창밖 거리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오고 간다.

영화관에서 나나는 사형 집행인과 사형수의 장면을 응시하면서 사형수와 같은 굵은 눈물을 흘린다. 죄가 있는지 죄가 있다면 어떤 죄인지는 분간할 수 없는데 집행인의 집행준비가 끝났다는 말과 그렇게 빨리요, 어떻게 죽이나요? 화형이오 라고 묻고 대답하는 대화는 슬프다.

젊은 사형수의 살고 싶은 욕망의 눈빛은 앞으로 나나의 일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조금은 짐작하게 한다.

 

그 당시 파리에서는 아주 늦은 시각에 해당하는 밤 11시, 나나는 낯선 남자를 만난다. 나누는 대화와 남자의 표정을 보니 그는 영화와 관련된 사람인거 같고 음흉스러운 눈빛이 나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 같다. 콘티를 보여 주는 동작은 아주 자연스럽다. 많이 해 본 솜씨같다.

어쩌다가 나나는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한다. 남이 떨어트린 돈을 밟고 있다가 슬쩍 한 것이 들통 났다. 젊은 경찰의 취조를 받으면서 나나의 일상이 또 한 번 확인된다.

정확한 주소도 없고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자주 가불한 이야기를 통해 그녀의 생활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건물을 사이에 두고 좁은 거리에는 여자들이 서 있다. 거리의 여자다. 나나는 아직 본격적인 창녀는 아니지만 다가오는 남자를 피하지 않는다.

방안에서 나나는 남자가 옷을 벗는 동안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짧은 머리를 매만지는 시늉을 하는데 이는 매춘이 처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는지 나나는 입술만은 허락하지 않는 지조를 지킨다. 교외의 한 카페다. 거기서 나나는 여자 친구인 이베트를 만난다. 사는 게 힘들고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고 열대지방으로 탈출하고 싶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이베트는 동거남 라울( 사디 레보트)을 나나에게 소개한다.

그 전에 이미 나나는 포주로 짐작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예쁘게 생겼고 머리는 짧지만 빨리 자란다는 내용의 글을 정자체로 느리게 써내려 간다. 그 모습을 라울이 본다. 이미 초면이 아닌 라울은 자연스럽게 나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키스를 한다. 남자 포주 라울의 손에 나나의 운명이 맡겨졌다.

나나가 원하는 바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제 나나는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창녀가 된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차안에서 나나는 묻고 라울은 창녀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이럴 때 라울은 자상한 아빠와 같다.

나나가 손님과 적나라한 관계를 맺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흥정을 하고 돈을 주고받고 서비스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를 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나나는 프로 창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애초 돈 벌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 어떤 일이든 오래하면 실증이 날 때가 있다. 찾아온 손님 가운데 나나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녀는 이제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몸 파는 이유로 돈이 더 이상 개입되지 않는 상황이 온 것이다. 자, 이 사실을 안 라울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인정사정없는 것이 포주인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답은 나와있다..

라울은 그녀를 갱단에 팔아넘긴다. 그 과정에서 짧은 두 발의 총성이 울리는데 한 발은 라울의 것이다. 그녀는 10걸음도 못 걷고 쓰러진다. 거리가 직업이었듯이 죽음도 거리에서 맞은 나나의 일생은 22살쯤으로 아주 짧다.

국가: 프랑스

감독: 장 뤽 고다르

출연: 안나 카리나, 사디 레보트

평점:

 

팁: 나나가 죽고 나서 영화는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FIN 자막이 오르고 화면은 꺼진다.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은 관객들에게 조금 더 의자에 앉아서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감독의 친절한 의도 때문일까.

노인과의 철학적 대화, 당구를 치는 젊은이 앞에서 추는 구애의 춤처럼 보이는 흔들거림은 인생의 한 자락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거두절미하고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으려면 너를 줘버려. -몽테뉴” 라는 시작과 함께 나온 자막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몽테뉴의 사상과 철학에 무지한 때문인지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하지만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적어도 라울에게는)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닌 순간 나나는 저 세상으로 갔다.

살아 있으면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에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쨌든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비브르 사 비> (원제: Vivre Sa Vie )는 기쁘기보다는 슬픈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나란히 앉은 차안에서 나나가 질문하고 라울이 답하는 ‘나의 창녀 사용설명서’ ‘매춘 입문서’ 혹은 ‘매춘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정도로 해석해도 무방한 두 사람의 대화들은 듣기에 마음이 찡하다.

초보 매춘부의 질문과 노련한 포주의 답변이 이제 막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나나의 호기심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파리에 간다면 아마도 나나가 손님을 찾아 걸어 다녔을 세느 강가나 루브르 박물관 근처 혹은 샹제리제 거리 등이 새로운 눈으로 보일 것 같다.

저기 앞서 가는 저 여자도 혹시 하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혹시 방금 지나갔던 여자가 나나처럼 생기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돌려볼지도 모른다.

숱이 많은 짧은 머리, 깃을 세운 길지 않은 코트를 입고 손에 담배를 들고 마치 내게 있는 것은 시간뿐이라는 듯이 여유를 부리는 여자가 있다면 비정한 도시 파리를 배경으로 영화의 제목처럼 멋대로 살다간 안나 카리나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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