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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똑바로 살아라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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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똑바로 살아라 (1989)
  • 의약뉴스
  • 승인 2016.05.0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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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어는 예나 지금이나 부담스럽다. 군대도 아닌데 계급사회처럼 해라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지부터 따져 보게 된다. 하시죠? 정도의 권유형이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똑바로 살아라>(원제: Do the right thing)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똑바로 살겠니? 혹은 똑바로 살려 무나 그도 아니라면 똑바로 살았으면 좋겠다 정도였다면 힘이 빠졌을 법도 하다. 어쨌든 영화는 똑바로 살지 못하는 인생들이 어떤 삶인지 거리를 비스듬히 비추면서 시작한다.

뉴욕이라고 다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브루클린은 어려운 사람들, 다시 말해 흑인들이 밀집해 사는 곳이다. 오죽하면 어떤 이는 이대로 가다가는 이곳의 평균수명이 북한보다도 못할 거라고 한탄했을까. 흑인이 많다 뿐이지 100% 흑인이 사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도 있고 한국에서 이민 온 젊은 부부도 있다.

전구 하나, 타일하나 다 내 손으로 일궜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다 라고 자부심이 대단한 샐( 대니 아이엘로)은 아들 피노 (존 터투로)와 비토(리처드 애드슨)와 함께 피자 가게를 하고 있다.

여기에 배달원으로 무키( 스타이크 리 감독이 직접 출연했다. 그는 연출은 물론 각본도 맡았다.)가 등장하는데 그는 당연히 백인이 아니고 흑인이다.

그에게는 까칠한 아내가 있고 어린 아들이 있다. 무키는 다른 흑인들과는 달리 힘들지만 배달 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리고 있다.

하지만 친구인 라디오 라힘(빌 런)이나 다른 흑인들은 일하는 대신 냉장고만한 스테레오 라디오를 틀고 하루 종일 거리를 배회하거나 큰 우산 아래 모여서 아무 의미 없는 잡담을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때운다.

술주정뱅이라는 놀림을 받고 있는 늙은 흑인 남자 메이어( 오시 데이비스)는 하릴 없이 길을 오가면서 아이들에게 똑바로 살 것을 주문하지만 누가 늙은이 그것도 술꾼의 이야기를 들을까.

라디오 디제이와 신문은 연일 펄펄 끊는 이곳의 더위 소식을 전하고 사람들은 제풀에 지쳐 떨어진다. 노는데도 날씨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 피자가게는 부지런히 돌아간다. 샐이 불만이 많은 아들들을 통제하면서 열심히 피자를 굽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들은 돈은 더 내지 않으면서 피자에 치즈를 더 얹어 달라고 실랑이를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 돈을 벌 궁리는 하지 않는다. (물론 흑인을 위한 일자리도 없다.)

 

큰 아들 피노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적대감정이 심하고 툭하면 무키를 무시하기 일쑤다. 더러운 이곳을 떠나 자기 인종인 이탈리아인들의 밀집지역에서 가게를 다시 열자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샐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다.

맞은편 편의점에서는 젊은 한국인 부부가 돈을 쓸어 모으고 있다. 흑인들은 찢어진 작은 눈에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국인을 멸시하고 조롱한다.

심지어 밀러 맥주가 없다고 당장 큰일을 낼 것처럼 화를 내는가 하면 문선명이나 믿는 놈들, 88서울 올림픽, 태권도, 빌어먹을 한국 놈들이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 그들 자신이 인종차별을 당하면서 한국인을 ‘개무시’ 한다.)

한국인 부부는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가게를 운영한다. 흑인들은 모여서 자신들 때문에 부자가 되는 피자집과 편의점을 시기하면서도 그들처럼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 생각이나 실천을 하지 않는다.

늦은 밤이다.

피자집은 문을 닫고 샐은 그날 돈을 많이 벌어 기분이 좋다. 라디오 라힘 일생은 가게 문을 두드리면서 피자를 주문한다. 아들은 무시하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문을 연다. 라힘은 예의 커다란 스테레오를 주문 대에 올려놓고 ‘퍼블릭 에너미’가 부른 ‘파이트 더 파워’를 크게 틀어 놓고 있다.

힙합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샐은 끄라고 명령하지만 라힘은 버티고 결국 샐은 야구방방이로 스테레오를 박살낸다. 그렇지 않아도 가게 벽에 흑인 사진은 없고 온통 백인사진 뿐인 것에 불만인 라임의 분노가 폭발한다.

전쟁이다. 흑인들이 몰려들고 샐과 아들은 죽음의 위기에 몰려 있다. 배달원 무키도 흑인 편에 가세해 자신이 일하던 가게의 커다란 유리창을 박살낸다.

한국인 가게도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한국인은 비굴하고 아주 아첨하는 표정으로 나는 흑인이다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말하면서 위기를 벗어난다.

흑인들은 부수려다 말고 저들이 흑인이라는데 한국놈들 내버려 두자고 한다.( 이 영화가 나오고 3년 후 1992년 L.A 에서는 대규모 흑인 폭동이 실제로 일어난다. 이 때 2300여개에 달했던 한국인 가게는 이 영화에서와는 달리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영화는 흑인폭동을 정확히 예언한 것이다.)

불을 지르고 거리는 난장판이 된다. 경찰이 오고 샐의 목을 조르던 라임은 경찰봉에 목이 꺾이면서 죽는다.

천사와 악마의 옛이야기라면서 사랑과 증오를 말하던 젊은 흑인은 더 이상 스테레오를 틀 수 없게 됐다.

흑인들은 달려들지만 증원된 경찰에 의해 제지되고 무리들은 소방호스의 공격을 받는다. 다음날 불탄 가게에 넋 놓고 앉아 있는 샐 앞에 무키가 주급을 받으러 오는 장면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다.

가게를 부수고 불을 지른 장본인 아닌가. 영화는 개판인 채로 끝난다.

자막이 오르고 흑인들의 우상인 마틴 루터 킹의 폭력은 사랑보다는 미움을 퍼트리므로 비양심적이라는 말과 재시 잭슨 목사의 자기 방어를 위한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지혜라는 어록이 올라간다.

영화는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폭력을 이들이 어떻게 바라 봤는지 관객 스스로 판단하도록 내버려 둔다.

국가: 미국

감독: 스파이크 리

출연: 대니 아이엘로, 오시 데이비스, 존 터투로, 빌 넌

평점:

 


팁: 흑인들이 폭력을 휘두른 것은 더위 탓도 크다. 그만큼 살인적 더위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시작도 그렇다. 청소라는 사소한 문제로 아들들이 말싸움한다.

금방이라도 서랍속의 권총을 뽑아 들고 방아쇠를 당길 분위기다. 거의 모든 대화가 그렇다. 대화중에 총소리가 나고 사람이 죽어 나가도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하게 여겨질 분위기다.

싸움을 위한 대화는 위태롭지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찡그리다가 웃도록 만들어 이 영화를 코미디로 분류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게 만든다.

누구하나 참는 사람이 없다. 일촉즉발의 상태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다 더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덥다고 폭력이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은 흑인들도 안다. 그

들은 노래제목처럼 권력에 맞서 싸워라 고 외치면서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다. 불을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쉽지만 일상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흑인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여주지 못한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잘 된 사람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잘 되려고 힘을 쓰지는 않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흑인의 행동이 정당하다거나 백인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인종차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흑인들의 삶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 놓았을 뿐이다. 수십 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군 피자집이 한 순간에 불바다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샐이나 그것이 후련하다며 춤을 추고 환호성을 지르는 흑인 중 누가 더 좋은 사람인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

것은 관객이 판단할 문제이다. 인종의 문제는 옳고 그름으로 단순히 파악할 수는 없다. 모든 복잡한 문제가 수 년간 누적되다가 더운 어느 날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종차별은 현재 진행형이다.

태초에 인간은 평등하지 않게 태어났으므로 완전한 인종의 평등은 파라다이스에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갭을 줄이고 좁혀 나가려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제2의 인종폭동을 막는 길이다.폭동이 일어나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이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흑인들이 입고 나오는 컬러풀한 화면이 불타는 가게의 불빛만큼이나 화려하다. 제목도 선동적이고 노래도 선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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