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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말테의 수기>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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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말테의 수기> (1910)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6.04.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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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가기 전에 시적 언어로 가득찬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은 것은 행운이다.

농익은 봄이 새싹만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과 가난과 죽음까지 거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으러 온다는 1, 2부로 지어진 이 책의 첫 문장은 띄엄띄엄 읽어 가물가물한 20대의 기억대신 첫사랑의 추억처럼 언제나 새롭다.

시작부터 죽음이니 이 책은 생과 사와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불협화음에 대한 기록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름날 냄새나지 않는 도시가 없다고는 하지만 하수도에서 무럭무럭 올라와 혹은 겨드랑이에서 배어나와 옷을 무겁게 만드는 온갖 냄새가 공기 속에 떠있는 지저분한 파리의 이곳저곳은 곧 죽어 시체로 나갈 자선병원처럼 을씨년스럽다.

 

그곳에서 나는 여러 인간 군상들을 관찰하고 같이 아파하고 외면하면서 삶이란 이토록 처절하고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것을 실감한다.

노트르담 드 상드의 텅 빈 거리에서 자기 몸속에 폭삭 가라앉아 구걸하는 여자는 두 손을 얼굴에 묻고 있지만 뭉그러진 모습까지 감출 수는 없다.

그러니 이 도시에서 병에 걸린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공포다.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이 사람의 내부에 죽음이 있다고 하니 닥치는 대로 죽는 죽음 앞에서 생을 발견하는 일은 기성복을 입는 것과 같다.

섬세한 시인,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눈에는 죽음이나 생이나 화투판의 패처럼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여자들의 커다란 배에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열매가 들어 있다고 느끼는데 불안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릴케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무언가 해야 했고 무언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밤새도록 글을 쓰는 일이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집도, 상속받을 재산도 심지어 개도 없다.)릴케는 트렁크 하나와 책 상자 하나를 소유하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최소한의 추억이라고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다.

추억이 쌓이고 나이 들어 늙게 되면 그 때 비로소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28살의 브리게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좋은 시를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하듯이 시를 쓰기 위해서도 숱한 만남과 이별만으로는 어림없다. 이런 생각을 회색빛 파리의 하늘 아래 6층의 어느 작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국립도서관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작은 행복을 느낀다. 센 강변에 가거나 루브르 박물관 대신 열람실에서 시인을 읽고 있으면 방해받을 것이 없다.

삶도 죽음도 허리를 굽실 거리며 따라오는 거지나 버림받은 자들에게 동전 몇 개를 던져 주면서 그들이 뿌리칠까봐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다.

약간 추운 날이면 지독한 가난 때문에 시인은 난로에 불을 피울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가난하지 않고 부자였다면 무엇보다 좋은 난로를 구입해서 질 나쁜 찌꺼기 석탄대신 화력 좋은 센 장작을 때고 싶고 전에 살던 사람들의 냄새가 밴 가구로 가득찬 방이 아니 다른 방을 얻어서 살수도 있다.

가난은 하루에 필요한 모든 힘을 탕진해 버리는데 무슨 힘으로 그 많은 그 위대한 시들을 썼을까. 릴케가 가난을 걱정할 때 나는 릴케의 위대한 시들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가을날’이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의 걸작을 남겼다. 가난이 때로는 약이 되기도 했나 보다.

어쨌든 릴케의 고뇌는 계속된다. 그는 쓰고 싶은 모든 것을 쓰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자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 쓴 기도문을 앞에 놓고 써놓은 대로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시가 아닌 존경하는 보들레르의 산문시 <파리의 우울> 속에 나오는 ‘새벽’의 끝 구절이다. 그가 옮겼듯이 나도 옮겨 본다.

“모든 것에 대해 불만족하고 자신에 대해 불만족하며 지금 이 밤, 고독과 적막 속에서 나는 스스로 기력을 되찾고 자신을 조금 사랑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내가 찬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나를 굳세게 해다오. 나를 지탱할 수 있게 해다오.

내가 이 세상의 허위와 부패로부터 멀리 있게 해다오. 당신, 나의 주인이신 신이여, 제게 은총을 내려 주시어 몇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쓰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못난 자, 멸시해 마지않는 자들보다도 더 못난 인간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민음사  2001, 문현미 옮김)

: 두려움 불안 공허 불신 고독 적대감이 순서 없이 나열된다. 하지만 간혹 열매를 맺게 하는 가을날의 뜨거운 햇살처럼 희망이나 꿈같은 의미도 섞여 있다. 삶을 온통 부정적으로만 그려놓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릴케는 유성이 떨어져도 그것을 보거나 소원을 빌지 않는 것을 나무라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말한다. 이루어지는 것이 없더라도 소원을 품고 있으라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있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더 또렷한 그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머니에 의해 릴케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어려서 여자아이처럼 길러졌고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여자 복장을 했다고 한다.

그런 릴케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을 양성하는 학교에 진학한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중퇴하고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지만.

연상의 여자들과 깊은 관계가 있었고 니체나 로댕 같은 인물과도 교류했다. 파리와 러시아, 독일과 스위스 여행 등을 통해 시적 영감을 얻었고 유부녀인 연상의 문필가 살로메에 연정을 품었다.

<기도시집> 제 2부 순례의 서에 나오는 “내 눈빛을 끄세요.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어요.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이 시는 살로메에게 바치는 시였음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릴케 필생의 역작으로 10년에 걸쳐 완성한 <두이노의 비가> 역시 20살이나 연상인 후작 부인의 정신적, 경제적 도움으로 완성됐다고 한다.

너무나 여성스럽고 여성스럽게 자랐던 릴케가 모성애가 철철 넘치는 유부녀와의 사랑으로 위대한 시를 쓰게 된 것은 어쩌면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대로 릴케는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으며 스스로 쓴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이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기꺼움이여’ 라고 쓴 묘비명아래에 1927년 묻혔다.

누구의 잠도 아닌 자신의 영원한 잠을 위해 기꺼이 시같은 묘비명을 쓴 릴케의 마지막은 너무나도 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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