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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파리대왕>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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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파리대왕> (1953)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6.03.2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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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군대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에도 군대 꿈을 꾸었다.

소집명령을 받아 두 번 입대하는 악몽은 아니었지만 심란한 기분이면 어떤 식으로든 군대와 연결됐다. 군복, GP, 철책, M16, 내무반, 태권도는 내 청춘이 푸른 제복에 실려 있었음을 상징하는 절대언어였다.

월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원제: Lord of the flies)을 읽으면서 섬에 고립된 아이들이 당분간은 빠져 나올 수 없는 나의 그 시절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상황은 그곳 보다 더 열악했지만 봉화를 올리는 과정은 그곳의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 놔도 돌아가므로 언젠가는 구조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과연 아이들은 저버리지 않는 꿈을 이뤘다. 2년이 지나면 제대하는 군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구조된 것은 애초의 꿈이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자 구조의 마음은 멀어지는 배처럼 시야에서 아득하다.

더 시간이 지나면 구조라는 말조차 잊게 되고 그래서 바라지도 않았던 구조가 어느 순간 도둑처럼 다가왔을 때 아이들이 느끼는 황당함은 놀라움과 진배가 없다.

 

핵전쟁으로 소년들은 태평양의 어떤 섬에 고립됐다. 6살에서 12살 정도로 추정되는 수 십 명의 아이들이 벌이는 어린 군상들의 하루가 벌거벗은 몸처럼 적나라하다.

금발에 어깨가 딱 벌어진 랠프와 3살 때부터 천식을 달고 사는 안경 낀 뚱뚱보 돼지가 주인공답게 맨 처음 등장한다. 이들은 소라를 분다.

자기 확신이 서 있는 것 같은 잭, 머리가 둥근 쌍둥이 샘과 에릭,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샤이먼, 얼굴이 검은 로저 그리고 성가대원과 나머지 꼬마소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빠른 구조를 위해 어른들처럼 대장을 뽑기로 한다. 잭이 먼저 나선다. 특대생 성가대원이고 지휘자이며 샤프 C도 노래할 수 있다고 뽐낸다. 하지만 선거로 랠프가 대장이 된다. 몸집이 크고 매력적인 풍채 그리고 소라를 가진 별난 존재인 랠프가 누가 보더라도 지도자 감인 잭을 제친다.

화난 잭을 달래기 위해 랠프는 그에게 성가대원을 맡으라고 하고 잭은 대원들을 사냥부대로 이용한다. 랠프는 돼지의 안경을 이용해 산정에 불을 지핀다.

잭은 사냥부대를 이끌고 멧돼지 사냥을 한다. 소라를 불면 모이고 소라를 든 아이가 발언권을 갖는다는 규칙과 불이 꺼지지 않도록 봉화를 지킬 당번도 정하고 비가 오면 피할 오두막도 비록 흔들리기는 하지만 해변가에 지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랠프와 잭이 서로 증오의 씨앗을 품는다.

시간은 기약 없이 흐른다. 아이들은 꽃과 과일이 넘쳐나는 무인도에서 때로는 희망을 품을 필요도, 어떤 때는 희망자체도 잊어버리고 그늘에서 낮잠을 자거나 수영을 하면서 노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예상외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우는 꼬마들도 드물다. 큰 불이 났던 저녁 꼬마들 중 하나가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이 됐어도 태연하다.

잭은 로저와 함께 사냥에 열중한다. 거듭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얼굴에 칠을 하고 가면을 쓰고 멧돼지를 잡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다. 적색 백색 흑색으로 얼굴을 채색한 마스크속에 숨은 잭은 당당했다.

그를 따르는 아이들은 잭에게 환호했고 꼬마들은 그를 거역하지 못했다. 랠프는 불이 꺼진 사이 사라져 버린 배를 보면서 봉화에 더욱 집착한다.

오두막도 짓지 않고 사냥을 간다며 당번에 빠져 봉화를 꺼뜨린 잭에 불만이 크다. 마침내 사냥에 성공해 의기양양한 잭은 사나워져서 옆에 있는 뚱보 돼지의 배에 주먹을 내지른다. 안경의 한쪽이 깨졌다.

아이들 사이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시간이 흘렀다. 잭은 패거리를 끌고 랠프와 결별한다.

뱀처럼 생긴 짐승이 있다거나 바다에서 또는 하늘에서 괴물이 나오고 저절로 부풀어 오르는 생물 그리고 유령이야기에 섬은 흉흉하다. 아이들은 이빨이 있고 까만 눈이 커다랗고 어둠속에서 나온다는 괴물의 정체를 몰라 더욱 조바심을 낸다.

잭은 로저를 앞세워 암퇘지도 잡는다. 잡은 암퇘지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도려내 바위위에 쌓아 올리면서 잭 일당은 점차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도려낸 돼지 창자 위에서는 피의 냄새를 맡고 온 파리떼가 내는 톱질 같은 소리가 욍욍거린다.

세를 불린 잭은 랠프를 찾아와 자기패에 합류할 것을, 돼지고기와 잔치를 미끼로 종용한다. 엉겁결에 잭과 돼지는 그들과 함께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고 소리를 지르며 빙빙 원을 돌고 창칼을 높이 든다.

그 때 무엇인가 숲속에서 기어 나오는 시커멓고 분명치 않은 물체가 보였다. 그들은 또 한 번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그 놈을 죽여라’ 고 외치면서 주먹질을 하고 손톱과 이빨로 물어뜯고 할퀸다. 짐승은 죽었다.

파르스름한 모래사장에 새우등을 한 시체에서 피가 조금씩 바다로 번져나갔다. 밀물이 오자 덥수룩한 머리는 흩어지고 시체는 서서히 먼 바다로 휩쓸렸다. 사이먼이다. 아이들은 샤이먼을 짐승으로 알고 죽였다.

더욱 신바람이 난 잭은 경계병을 세우고 수하를 하고 자기편을 가렸다. 랠프와 돼지와 쌍둥이 형제인 샘과 에릭은 적이됐다. 제트기를 탄다면 고국 영국에 다음날 아침이면 도착할 거라는 기대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섬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봉화를 올리는 일도 구조될 희망도 없어지자 아이들은 미쳐가기 시작했다.

잭과 사냥부대는 랠프의 오두막을 습격해 폭행을 가하고 돼지의 안경을 부러뜨리고 불을 훔쳐갔다. 랠프는 잭에게 ‘너는 형편없는 짐승이야, 개나 돼지이며 도둑놈이다’며 돼지의 안경을 돌려 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창이었다.

잭은 이제 더 이상 랠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섬의 실제적인 대장이었다. 돼지는 사냥이나 살생대신 규칙을 지키고 합심을 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야유의 함성에 묻히고 뚱보는 패거리들이 위에서 굴린 돌에 맞아 골수가 부서져 죽는다.

소라도 박살이 났다. 쌍둥이 형제는 잭의 편이 됐고 랠프는 혼자 도망친다. 소년들은 더 이상 선생님, 선생님 하던 모자 쓴 학교 학생들로 돌아갈 수 없었다.

: 도망치다 쓰러진 잭의 앞에 큼지막한 챙 모자를 쓰고 연발권총을 찬 해군 장교가 서있다. 그 뒤에는 상륙함에 내린 작은 보트와 경기관총을 든 해군이 있다.

섬은 무서운 기세로 불타고 있다. 장교는 잭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얼굴에 온갖 칠을 하고 창을 들고 달려오다 멈칫 거리는 소년들의 무리를 본다.

한 줄로 서서 수색하다 마침내 랠프를 발견하고 추격하던 아이들, 막대의 양쪽 끝을 뾰족하게 깎았던 로저.

이들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 상황인가. 재미있는 놀이를 했거나 전쟁을 했거나 아니면 딴 일이 하고 있었나.

장교는 어리둥절하다. 죽음직전에서 살아난 랠프는 또 어떤가. 그리고 죽여서 피 맛을 보고 빙 둘러서서 춤을 추며 잔치를 벌이며 즐기려던 잭의 무리들은.

어떤 황당한 사건보다도 이처럼 황당할 수는 없다. 장교와 잭과 아이들이 가졌을 이 난처함을 뭐하고 표현해야 할까.

할 수 있는 것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것과 너희들 말고 어른들은 없니? 묻는 질문뿐이다.

이제 꼬마들은 하얀 시트가 덮여 있는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지만 이들은 샤이먼이 겪었던 공포와 돼지의 죽음 그리고 창과 칼과 폭력의 어둠속을 오랜 기간 헤매게 될 것이다.

사족: 아이는 어른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며 아버지이며 스승이라고 했다. 어른들이 다투고 전쟁을 하니 아이들이 보고 배울게 그것밖에 더 있나. 전쟁으로 어른들은 거의 다 죽고 아이들만 살아남았다.

꼬마들은 어른들처럼 편을 가르고 싸우고 힘센 자가 약자를 괴롭혔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심히 괴롭다. 차라리 파리로 태어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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