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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협녀(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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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협녀(1969)
  • 의약뉴스
  • 승인 2016.03.2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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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감독의 걸작 <와호장룡>(2000)에는 숱한 기가 막힌 장면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 최고의 신은 대나무를 타고 싸우는 주윤발과 장쯔이의 대결이다.

어안이 벙벙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대나무밭 결투는 사실은 이안감독이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호금전 감독의 협녀(원제: 俠女)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대나무의 전설을 착각할 뻔했다.

이안 감독보다 무려 50년 전에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 대나무를 이용해 적을 제압하는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는데 성공한 감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호금전이 되시겠다.

우리말로 ‘여전사’ 정도로 번역할 <협녀>는 무협영화의 선구자로 왜 호금전을 꼽는지 보고나면 잘 익은 벼처럼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초야에 묻혀 사는 범생이 고성제(석준)는 책을 읽거나 남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으로 밥벌이는 하고 있다. (그는 석장군처럼 맹인으로 위장해 위기의 순간에 엄청난 무력을 과시하는 숨은 검객은 아니다. 약장수로 변신해 있는 노장군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는 칼을 쓰지 못한다. 그가 어느 순간 붓을 버리고 무기를 잡을 거라는 생각은 오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관리가 최고라는 어머니는 과거도 보지 않고 대를 이을 생각도 없는 그런 아들 (내겐 학문이 최고이며 비록 가난하지만 세끼 굶지는 않으니 돈 모이면 서당이나 열겠다.)이 원망스럽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어느 날이다. 고성제는 귀신(잡초가 우거지고 거미줄이 산만하고 무너진 나무더미에 새들이 날고 오래된 석상이 서 있는 곳이니 귀신이 나올 법도 하다.) 이 나오는 폐가에서 예쁜 양낭자( 서풍)를 만나는데 한눈에 홀딱 반한다.

하필 그날따라 달은 휘영청 밝다. 친구는 없어도 달과 그림자와 셋이서 즐기는 술 한 잔의 기쁨을 노래하는 여자의 간드러진 소리에 끌려 고성제는 그만 여자 옆에 고꾸라지고 만다.

 

꿈같은 하룻밤을 지냈지만 그는 그녀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누구인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현상수배범으로 몰린 양낭자의 수배전단을 그려야 하는 고성제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하급 관리로부터 그녀는 충신의 딸로 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 죽고 일가도 멸했으나 낭자만이 유모와 함께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말을 듣는다.

뿌리를 뽑기 위해 관에서는 동방패의 도움을 받아 낭자 일당을 섬멸하려고 혈안이다. (당시 관리들은 패거리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그들의 명령을 따르면서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쫒기는 양낭자에게는 석장군이 있고 고성제가 있다. 무기를 쓸 줄 모르는 고성제는 학문으로 익힌 병법으로 한 번에 여러 발이 발사되는 화살과 허수아비 등을 등장시켜 무수한 적들은 낙엽 쓸듯이 쓸어버린다. (즐비한 시체 더미를 내려다보며 그는 자신이 만든 기계들을 시험하면서 남자다운 호탕한 웃음을 선사한다.)

불력이 대단한 큰 스님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다. 스님은 마치 바위처럼 단단해 웬만해서는 눈 하나 꿈쩍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관리는 스님 앞에 가짜로 무릎을 꿇고 남은 인생을 불법에 귀의하겠다고 간청한다.

그러면서 기습을 노려 스님을 공격하는데 일격을 당한 스님은 죽는 듯이 보이지만 느릿느릿 언덕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있다. 불경소리와 함께 스님의 등 뒤로 화려한 후광이 비치고 무리들은 모두 저승길로 향한다.

자칫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었을 스님의 등장은 영화에 선세계의 신비로움을 집어넣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간세상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싸움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다. 특히 단 칼에 잘리는 대나무와 그 대나무를 타고 올라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일직선으로 낙하하면서 날뛰는 수소에 투우사같이 칼을 꽂는 양낭자의 솜씨는 ‘그래, 바로 그거야! 그 장면을 생각했어 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다. ( 이 장면은 리플레이해서 서 너 번 봐야 직성이 풀린다.)

화려한 칼 솜씨, 날고 기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민첩함,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지략 등이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장대하게 펼쳐진다. 무협지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협영화의 모범답안이 바로 <협녀>가 되시겠다.

국가: 대만
감독: 호금전
출연: 서풍, 석준
평점:

 

팁: 1시간 40 분 만에 전편이 끝나는 3시간이 넘는 긴 시간임에도 지루할 겨를이 없다. 빛이 통과할 만큼 빈틈도 없다.

고비마다 등장하는 스님의 흔들리지 않는 무심이 인간세상과는 다른 무엇을 보여준다. 무술의 고수들이 사방에서 주먹을 날려도 가볍게 되치고 칼이나 표창이 다가와도 호들갑 떨지 않고 목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어 주는 스님의 내공이 부럽다.

어머니 바람대로 고씨 가문의 대는 이어진다. 고성제는 홀연히 떠난 양낭자를 그리워 하며 무작정 산으로 들로 헤매다 절 근처에서 강보에 쌓인 아이를 발견한다.

그가 아이를 소중히 안고 있는 모습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양낭자가 지켜본다. 이는 하룻밤 사랑으로 고씨 집안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바로 그 직전 양낭자는 그를 쫓는 자들과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인다. 그가 임신했다는 증표인 불록한 배도 보이지 않고 움직임도 둔탁하지 않은데 언제 아이를 낳았는지 엉뚱한 생각이 좀 들었다. 어쨌든 그것은 이 영화의 핵심과는 별 관계가 없으니 시비 걸 마음은 없다.)

현악기와 타악기가 어울어진 음악은 중요한 순간에 긴장감을 더하거나 뻬거나 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한편 2014년 개봉한 박흥식 감독의 <협녀, 칼의 기억>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 주연)은 역대급 실패작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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