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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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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1926)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6.03.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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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경기에서 역전으로 승부가 갈릴 때 흔히 쓴다.

게임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역경을 딛고 일어선 순간 우리는 인간승리를 찬미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 오른다>(원제: The sun also rises) 를 읽고 나니 불현듯 야구 게임에서 9회 말 투아웃 투 스트라이크 노볼 상태에서 역전 만루 홈런을 친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내 술 먹고 잠자고 일어나서 술 먹고 다시 자고 일어나서 술 먹고 연애하는 일과가 되풀이되다가 막판에서 술 취하지 말라고 부르짖는 장면이 꼭 그런 느낌이었다.

30대 중반의 주인공들이 하는 일은 거의 없고 매일 먹고 마시고 춤추고 여행가고 색에 미쳐 방황하다가 마침내 어렴풋하게나마 자기 자리를 찾아 간다고나 할까.

그러니 입가에 웃음이 가득할 수밖에. 사실 나는 다른 위대한 고전들과 비교해볼 때 이 책을 대단하다거나 엄청나다거나 그에 견줄 수 있다거나 조금 부족하지만 차이 날 정도는 아니라거나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서평을 쓰는 지금도 흡사하다. 묘사나 문장이나 스토리나 짜임새나 그 무엇 하나 비교우위에 있는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

마지막 절규 부분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이 작품을 ‘ Oh my  해피타임 고전명작읽기’ 목록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1부가 끝나고 2부도 지나 책의 1/3 정도를 읽었을 때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쌓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주인공들은 술 먹고 자고 또 먹고 춤추는 것 말고는 달리 하는 게 없었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대화도 심오하기보다는 매우 허접하다.)

그래서 역자 후기나 책의 뒷날개에 적힌 어마어마한 찬사만 아니었다면 벌써 중도 포기했을 것이다. 더 읽고 싶지 않을 때마다 나는 뒤로 돌아가 '타임 선정 100대 영문소설'이니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 혹은 '헤밍웨이 문학의 이정표가 된 최초의 걸작' 등의 글자에 눈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인 나 제이크는 미국인인데 뉴욕이 아니고 파리에서 산다. 그러니 국적 상실자다. 파리에는 나 말고도 친구 로버트 콘과 빌이 있고 여자 친구 브렛이 있고 브렛의 약혼자 마이클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몇몇 사람들과 오다가다 만나는 주변인들이 있다. 이들은 파리의 여기저기를 걷거나 택시를 타고 쏘다니면서 술 먹는 것이 하루 일과다. 술 먹다 지치면 송어 낚시를 하러 가고 투우 경기를 보러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는다.

스페인에서도 하는 일이라고는 술의 종류만 다를 뿐 왠 종일 술 취해서 시답잖은 사랑타령이나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생산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데 간혹 신문사에 기사를 보내야 한다거나 원고를 써야 한다고 지나가는 말을 흘리면서 부르조아 흉내를 낸다. 그것으로 생활비가 충당 될 리는 없다. 흥청망청 쓰는데 드는 그 많은 돈은 미국에서 온다는 한 줄로 뭉뚱그린다.

미국이 호황이고 뉴욕이 굉장하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돈을 벌지는 않으면서 왕처럼 소비하는데도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철부지 10대도 이 정도는 아니다.

나누는 대화도 거창하기는커녕 시시껄렁하다. 어제해도 되고 오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내일 안한다고 해도 애석할 일이 아니다. 국가나 사회나 이념이나 내면의 심오한 고민이나 뭐, 이런 것 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심각한 이야기는 여자 때문이거나 남자 때문에 겪는 사랑 놀음 뿐이다.

새벽까지 술 먹고 다음날 정오쯤 일어나 다시 술 먹는 일이 되풀이 되는데 언제 기사를 송고하고 언제 원고를 쓰는지 도통 알 수 가 없다.

어쨌든 주인공은 나다. 내가 관찰자로 끼어들어 다른 인물들의 행동거지를 따라간다. 빠져 있지 않고 끼어 있음으로 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볼 수 있다.

한 때 프린스턴 대학의 미들급 권투 챔피언이었던 내 친구 로버트 콘은 비평가들이 그렇게 형편없다는 평을 하지 않은 장편소설을 한 권 썼다.

이혼 했고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으면서 내 여자 친구인 브렛을 사랑해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범생이다.

몸매가 좋고 사내처럼 머리를 빗질해 뒤로 넘긴 예쁜 브렛이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이런 찌질이를 사랑할리 없다. ( 하지만 단 둘이 어디로 놀러가기도 한다.)

전쟁에 일곱 번이나 참여하고 혁명을 네 차례나 겪은 백작 등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의 사랑을 받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브렛이 아닌가.  많이 취해 잠시 이성을 잃거나 심하게 외로울 때면 남자를 바꿔가면서 사랑의 도피를 하거나 잠자리로 위안을 삼기는 하지만 말이다.

브렛은 이혼 수속 중이고 마이클과 약혼한 상태다. 정해논 남자가 있어도 다른 남자와 수시로 놀아난다. 나 역시 브렛이 좋고 브렛도 나를 사랑하는데 둘이 육체적으로 맺어졌다고 확신할 만한 상황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관계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브렛이 거부하거나 내가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둘이 육체적 교접에 이르지 못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전쟁에 참여한 나는 형편없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하필이면 그곳, 남자의 심볼에 부상을 입었다.

성불구자가 된 나는 거세된 수소처럼 브렛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지 못하고 키스에만 매달린다. 그 심정 오죽하겠느냐마는 나는 잘도 참아낸다. 그 문제로 심각한 지경에 이른 적도 없다. 다만 콘이나 마이클이 브렛을 육체적으로 눌러 준다는 생각을 할 때면 씁쓸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운 것도 아니다.

나의 이런 마음은 아랑곳 없이 브렛은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마구 남자를 갈아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녀 같지 않고 조신하고 참신한 여자로 그려진다. 아마도 왕족은 아니어도 공작이나 백작의 가문 다시 말해 경의 호칭을 듣는 전남편과 결혼한 이력 때문일 것이다.

브렛이 겨우 19살인 투우사 로메오와 육욕에 빠져 도피를 했을 때도 오죽 사랑했으면 그랬을 까 하는 생각이 들 뿐 약혼자 마이클을 배신한 창녀라고 매도되지 않는다.(사실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나나 나의 친구들은 전혀 아니다.)

스페인 투우 투어는 이 책에서 가장 활발한 부분이다. 무려 일주일간 도시는 광란에 들떠있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부상자가 속출한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소들이 사라지자 관중들은 썰물처럼 도시를 빠져 나간다. 우리들의 여행도 끝이 났다.

브렛은 약혼자 마이클이나 그를 따라 다니는 로버트 콘이나 애송이 투우사 대신 나와 함께 있다. 둘이 마주 앉았으니 하는 일은 첫 잔을 마시기 전에는 손이 떨리는 알코올 중독자 답게 먹고 취하는 일이다.

이제 34살이 된 브렛은 말한다. 내가 파리에서 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1905년 투우사가 태어났어. 난 창녀가 되지 않을래.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

둘은 건배를 한다. 나는 기분이 좋다는 브렛을 보자 덩달아 좋다. 술을 먹는 속도가 빠르다. 이 때 브렛이 자기! 술 취하지 마, 술 취하지 마 라고 절규 하듯이 외친다. ( 마치 뭉크의 '절규' 그림처럼 브렛이 머리를 감싸고 오, 나의 자기! 취하지 마, 내 사랑 취하면 안돼 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연상된다.)

안취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취한다고 해서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데 브렛은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은 취하지 말라고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술 취하지 말고 적당히 마시고 이제 사람 구실을 하자. 응, 자기야! 이렇게 제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빠르게 움직이는데 제대로 살기는커녕 먹고 또 먹는 일에만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참 을 수 없기 때문일까. 하나같이 아픈 사람들뿐인데 놀기만 하는 나와 우리들이 비참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 책의 첫 머리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당신들은 모두 길을 잃은 세대요." 그리고 그 아래는 전도서를 인용한 “한 세대는 가고 간 세대는 오되 빵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가 이어진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길 잃은 세대를 다룬 첫 작품이라는 의미가 확 닿는 대목이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학살이 벌어졌던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파리의 거리.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특파원과 작가들을 등장시켜 하루 종일 먹고 마시는 온종일 만취상태의 젊음을 그려내고 있다.

전쟁의 환멸과 이로 인해 가치관이 상실되고 무너져 내린 젊은이들의 좌절된 인생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인공들이 마시는 술은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 위스키 포도주 맥주는 기본이고 그 지역의 허다한 술이 허기진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술을 음미하고 맛으로 먹기 보다는 취하기 위해서 먹고 하루 종일 먹고도 다음 날 멀쩡한 정신으로 또 술을 먹는데 숙취로 인한 고통은 거의 없다. 대단한 술꾼들이고 술을 받쳐주는 간이 부러울 뿐이다.

투우 장면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책보다는 영화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대인과 흑인에 대한 도를 넘고 있는 비하가 마음에 걸린다. 헤밍웨이, 왜 그랬어.?  ( <노인과 바다> 에도 흑인을 비하는 검둥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가 선천적, 후천적 인종 차별주의자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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