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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겨울이야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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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겨울이야기(1992)
  • 의약뉴스
  • 승인 2015.03.22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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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코와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피천득 선생의 ‘인연’은 너무 유명해 교과서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소학교 시절 처음 만나고 성심 여학교 영문과 3학년 때 한 번 그리고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마지막 만남이 10여년의 간격을 두고 이어진다.

그 사이 해방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끝난다. 아사코와 선생이 뾰족지붕에 뾰족 창문이 있는 동화책에 나오는 그런 멋진 집에서 살았는지 아닌지는 다들 알 것이다.

‘인연’을 서두에 인용한 것은 에릭 로메르 감독의 <겨울이야기> (Conte d' Hiver 영어명: A Winter's Tale)가 ‘인연’에 나오는 인연처럼 기묘한 인연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짧지만 강렬한 섹스신이 나오는 프롤로그 이후 영화는 펠리시 (샬롯 베리)와 샤를리(프레데리크 반덴 드리세)의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질지에 모아진다. ‘인연’처럼 세 번의 만남이 이어질지 아니면 재회로 끝날지 그도 아니면 평생 만나지 못할지 관객들은 조바심을 내며 화면을 응시한다.

5년의 세월이 지난 후 펠리시는 여전히 샤를리를 못 만나고 있다. 그 사이 두 명의 남자가 그녀 곁에서 맴돌고 펠리시는 좋아는 해서 이들과 잠자리는 하지만 사랑은 아니어서 결혼은 하지 않는다.

펠리시는 어린 딸과 함께 배가 나온 뚱뚱한 미용사 막상스( 미쉘 볼레티)를 따라 기차로 2시간 걸리는 외곽으로 간다. 그러나  더 머무를 수 없다며 다음날 어머니가 있는 파리로 돌아온다.

한시도 책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범생이 루이(에르베 퓌릭)와는 그냥 친구로 지내는 것이 속 편하다.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펠리시는 어딘가에 분명히 샤를리가 있고 반드시 살아 생전에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전생을 믿기 때문이다.

어깨만 스쳐도 수 십 억겁의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여름날의 해변에서 그렇게 안달이 나서 못 배 길 정도로 부둥켜안고 할 것 못할 거 다했으니 전생을 믿는 사람에게 두 사람의 인연은 지구 탄생의 시간보다 더 많은 인연으로 뭉쳐 있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 버스 안에서 펠리시와 샤를리는 기적처럼 만난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는 기분이 이 보다 더 황홀 할 수 있을까.  핸드폰은커녕 전화번호도 없는 것을 내내 안타까워하던 관객들은 실수로 주소를 잘 못 적어줘 헤어진 내 애인을 만난 것처럼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쉬게 된다.

 

마술처럼 그가 나타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은 여자의 12월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하게 끝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따분할 정도로 지루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우유부단한 두 남자 사이에 낀 펠리시의 안타까움이랄까. 하지만 이런 느슨함은 소피 마르소를 연상시키는 펠리시의 압도적인 미모와 자연스런 연기로 만회된다.

피천득의 ‘인연’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세 번을 만나고도 맺어지지 못한 나와 아사코에 비하면 두 사람의 인연은 천생연분이다. (후반부에 셰익스피어 원작의 <겨울이야기>를 삽입한 것은 이같은 인연과 운명에 대한 암시로 받아 들여진다.

로메르 감독은 “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랑 비극 신비 등을 꾸밈없이 보여주려 했다” 고 제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

국가: 프랑스
감독: 에릭 로메르
출연: 샬롯 베리, 프레데리크 반덴 드리세
평점:

 

팁: 펠리시가 따라갔던 미용사에게는 만나는 여자가 있다. 이 여자의 존재를 그녀도 안다.

샬롯의 또 다른 철학자 남자는 미용사 남자와 샬롯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것을 이해한다. 미용사도 책벌레와 그녀의 사이를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녀의 엄마도 두 남자를 손바닥처럼 알고 딸도 그렇다. 그렇지만 두 남자와 한 여자는 이런 복잡한 관계를 전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참 쿨하다. 결혼만 하지 않는다면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만나거나 여러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고 이들이 서로 알고 지내도 서로 게의치 않는다. 열린 연애의 나라 프랑스의 남녀관계는 한마디로 흐르는 물처럼 역류하지 않는다.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들의 노는 방식은 대개 이렇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이야기 시리즈 중 두 번째 영화로 기가 막히게 행복한 결말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녹색광선>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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