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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바보들의 행진(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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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바보들의 행진(1975)
  • 의약뉴스
  • 승인 2014.01.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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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젊음의 특권은 '비판과 저항'이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비리를 거부하는 것은 청춘의 몫이다. 특히 대학생들이라면 시대의 고통을 온 몸으로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것이 젊음이다. 얼굴이 해맑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다 젊은이가 아닌 것이다.

고루한 사고와 잘못에 침묵하면 그는 젊어서도 노인과 다름 아니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영문명: The Marth Of Foolish)은 젊은이 바로 그 대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가 나온 1975년은 유신의 시대였다. 체제에 반대하거나 어둡고 비관적인 것은 당연히 금기시됐다. 머리가 길다고 장발단속을 당하고 노래가 불순하다고 금지곡이 됐으며 길을 가다가 불신검문에 걸리면 가방 속을 다 뒤집어야 한다.

영화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더 심한 억압을 받았다. 시위대의 장면은 야구응원전으로 바뀌고 매춘을 하러온 일본인과의 싸움은 아예 통 편집 됐다.

세상이 하 수상하던 시절에 대학교 철학과 병태 (윤문섭)와 영철(하재영)은 불안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로 속을 끊인다. 단체미팅에서 만난 불문과 영자(이영옥)와 순자( 김영숙)도 이들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

바보 멍텅구리 병신 쪼다 여덟 달 반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할 일은 별로 없다. 연애를 하다가도 통행금지를 걱정해야하고 당구를 치다가도 신문팔이 소년을 의심한다.

담배와 술이라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도 아버지 돈으로 들어온 영철. 술만 먹으면 고래 잡으러 동해로 간다고 횡설수설한다. ‘이유없는 반항’(1955)의 제임스 딘을 연상시키는 병태는 그런 영철과 둘도 없는 단짝이다.

연애도 같이 하고 술도 같이 먹고 담배도 나눠핀다. 이들은 서로 고민이 닮았다. 할 거라고는 공부 밖에 없는데 까뮈의 ‘이방인’ 조차도 읽지 않으니 이들은 공부하는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항하는 학생도 아니고 말 그대로 놀고먹으면서 지나가다 돌이나 한 번 차보는 시답지 않은 젊은이들이다.

휘파람을 불며 세상은 우리들의 시대라고 부푼 꿈을 꿀 때도 있지만 막연하다.  군대를 가야하고 졸업 후에 대한 비전도 별로 없다. 예쁜 영자나 새침 떼기 순자는 그런 병태와 영철이 미덥지 못하다.

시간이 갈수록 불확실한 미래가 이들의 의식을 사로잡는다.

 
영철은 소원대로 동해바다로 간다. 자전거를 타고 앞만 보고 질주하는 영철.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절벽위에서 영철은 자전거를 탄 채 앞으로 내달린다.

병태는 군대에 간다. 바보들의 행진은 더 이상 행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끝난다. 이 영화는 최근 영화전문가들이 뽑은 ‘한국영화 베스트 100’가운데 김기영 감독의 하녀( 1960) 유현묵 감독의 오발탄( 1961)과 함께 공동 1위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송창식의 노래 ‘왜불러’와 ‘고래사냥’이 영화에 수없이 등장한다. 최인호 원작과 각본이지만 원작과 다른 부분이 있고 일부는 각본과 다르게 제작됐는데 이는 순전히 하 감독의 의중이 반영된 때문이라고 한다.

5.16 광장( 지금은 여의도 공원으로 바뀌었다.)을 위통을 벗고 질주하거나 ‘한국적 스트리킹’이라고 하는 장면( 당시 유신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교수회의 결정에 따라 무기한 휴교를 알리는 대자보, 교내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들립니까, 들립니까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 등은 이 영화가 단지 젊은이들의 치기만 그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이런 장면들은 기억에 남는다.

흰 팬티를 입고 나란히 서서 받는 신체검사, 회비 2000원의 단체 미팅 티켓, 대학연극, 포장마차, 손잡이가 하나인 검은색 대학생 가방, 음악다방, 갈매기의 꿈이 아닌 우리들의 꿈, 교통순경의 알밤 때리기, 문과대 술 마시기 대회( 심사위원으로 코미디언 이기동과 젊은 시절 최인호가 잠깐 등장한다.) 빛바랜 청바지,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 시계를 맡기고 술 먹기, 차비 25원, 짬뽕 한 그릇 100원, 가정교사, 불타기 전의 남대문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면서 휘파람으로 부는 ‘댄서의 순정’, 어린이 대공원의 사슴, 묘지에서의 데이트 등은 그 시대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장면들이다.

영철이 죽고 나서 영화는 종착역을 향한다. 입영 열차 안의 병태. 떠나는 기차를 따라 달려오는 영자. 둘의 키스신은 한국영화의 명장면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개를 숙여도, 점프를 해도 입술이 닿지 않자 지나가던 헌병이 영자를 들어 올리는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하길종 감독이 외부검열이나 자기검열 없이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얼마나 더 좋은 작품이 탄생했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멈출 수 없었다. 대개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하감독도 3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국가: 한국
감독: 하길종
출연: 윤문섭 하재영 이영옥 김영숙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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